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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화 시대의 역량교육

나무와 들풀 2020. 5. 5. 18:37

<2020 시흥시 교육정책 학습모임 2>

일시 : 417일 금요일

장소 : ABC 행복학습타운

주제 : 근대 사회의 역량 교육

주제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박지애

 

발제 내용

문제 의식 한국 학교 교육에 미래가 있는가?

어차피 한국 교육에 답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교육을 부정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2.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푸코는 근대적 인간이 균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근대에서 인간은 사유와 행위의 근원으로서의 정적이고 이미 주어진 주체였다. 이성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고, 세상과 나도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적인 사고는 필연적으로 우열을 나누게 된다. 육체보다 이성의 우위, 자연보다 우월한 인간. 그러나 인간이 과연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볼 때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세상과의 관계이다. 나는 ‘000의 부모이며, 00시의 시민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

특히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의 기능이 다 해서 기계로 대치한 경우 그것은 나의 몸인가 아닌가, 혹은 몸에 칩을 장착한 후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인간 신체를 어디까지 경계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생겨난다. 이렇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경계에 균열이 계속 일어나면서 근대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3. 근대 사회의 새로운 인간

인간에게는 라고 할 확고부동한 자아는 없다.(환경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여기에(변하지 않는 이성) 바탕을 둔 근대 교육이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껏 규범으로 보고 했던 규정성을 허물지 않으면 앞으로 다갈 올 것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는 변하지 않는 어떤 본질이 아니나,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가가 를 규정한다. 나는 어떤 정보를 접하느냐에 따라 내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불변이 아니라 순간순간 출현하는 나이며, 상황에 따라 계속 차이를 만들어간다.

근대에서 교육은 안다는 것을 밖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밖의 것을 똑같이 인식할 것이라고 보았다. 인지심리나 발달심리 이론들이 그렇게 교육이론으로 들어왔다. 인식 능력을 규정하고 그것을 기르려고 했으며 그것에 교육적인 의미를 두었다.

탈근대적 입장에서는 인식 능력 자체가 그때 그때 만들어진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것이 배움이다. 어떤 것을 만나느냐에 따라 만들어내는 능력도 달라진다.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이 생성되는 것이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을 모두가 똑같이 인식한다고 보는 것이 근대적 교육의 출발이라면, 탈근대적 교육은 태양과 나의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식이라고 본 것이다. 난시가 보는 태양, 색맹이 보는 태양, 새벽에 보는 태양, 안개 속에 보는 태양 이것들은 다 다르며, 이 다르다는 인식 자체를 배움으로 규정한다. , 근대적 교육에서는 태양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배움이라면 탈근대적 배움은 다 다른 태양이 있음을 알고, 내가 만난 태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식하는 것이 배움이다. 훨씬 창조적이며, 감각적이며, 고차원적인 사유 과정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감각도 인식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인정한다. 근대교육에서는 차가운 이성이 작동하기 위해서 감각을 최대한 죽일 것을 요구해 왔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답을 모두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적 배움이라면, 탈근대적 배움은 너의 답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배움이고 창조이다.)

4. 새로운 인간관에 비춰 본 역량 교육의 한계

시대는 탈근대이나 교육은 여전히 근대적 인간관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학교교육이 특정한 인식능력들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준에 맞게 조화를 이루면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작동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런 교육은 일정한 규칙이나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하고 위계화하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탐색하는 도구로서 자신의 신체적 변화나 감각을 신뢰하기보다 누군가 이미 생성한 것()을 인지하는 것까지 하게 하거나, 하게 된다. 이렇게 교육하는 것은 역량을 키울 수 없다.

5. 근대 사회의 역량 교육

-임에서 됨으로 전환하기(내가 ‘-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멈출 수 없다. 계속 ‘-가 됨을 반복하는 것이 배움이다.) 이것이 역량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학습과는 달리 학습자들의 신체적이고 무의식적인 측면들을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있음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법칙으로 내 삶을 바꾸는 것, 이런 것들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평형 관계를 깨뜨리는 사유를 강제하는 충격을 제공한다거나, 개념을 깰 수 있게 새로운 방식의 학습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런 방식에서 기호와 접하면서 마주하는 애매모호함을 익숙한 방식으로 성급히 포착하려고 하지 않고, 그 가운데 충분히 머무르고 탐구할 수 있도록 교사는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학생들은 기호를 해석하고 현실적 차원에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세계가 내뿜는 기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이자 학습의 진원지일 뿐 그것 자체를 아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질의 응답 및 토의

질문 1 : 뇌에 칩을 인식하여 어떤 기능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다 똑같아지는 것 아니냐?

답변 : 신체성이 있는데 신체성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뇌도 신체 중에 일부다.

질문 2 : 세상의 균열은 미세한 균열에서 온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 미시적인 균열과 변화를 만들기 위해 그것을 열어줄 수 있는 서포트가 필요하다. 정책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질문 3 : 되기 위해 할 수 있지 않나? ‘-에서 ‘-인가?

답변 : (여기서 ‘-정답의 상태임이다. ‘-은 나의 변화이다. 역량은 나의 변화를 끌어내는 힘이다. 그것을 배움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도 교과교육과정으로 들어가면서) ‘아는 것에서 하는 것으로, ‘하는 것변하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아는 것을 적용하고 분석하고 관찰하는 기능적인 차원에서 역량을 말하고 있다. , 역량을 아는 것에서 할 줄 아는 것’, 기능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을 비판한 것이다. (배움은 기능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힘이다.)

질문 4 : 발도로프에서 인지 교육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보편적 인식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니까 교육이 더딘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교육을 시작했다. 지금 현실은 어렵다. 이런 논의가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 아닌가?

답변 : 이제 우리는 기계보다 빠를 수 없다. 그래서 느려질 필요가 있다. (기계하고 경쟁할 필요가 없다.) 기계가 (빠르게) 하고, 우린 (기계가 할 수 없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다 똑같이 알고 그것을 지킬 때 질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서로 다른 것들이 합쳐지고 변하고 해서 새로운 이질적인 질서가 아름다움을 만들 수도, (그 속에서) 새로운 소통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질서가 (생기고) 유지될 수 있다.

질문 5 : 교과서가 문제가 교육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답변 : 현재 역량 교육은 교과기반 역량 교육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역량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