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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교육하다, 가르침, 비에스타 본문
가르침
비에스타
정리 박현숙
교육의 수단은 의사소통이다. 꼭 말과 글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교육의 행위는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육이 의사소통을 통해 작동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곧 교육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교사가 동료 학습자라거나 학습의 촉진자라는 견해에 반대하며, 교사란 교육의 상황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들여오는 존재라고 제안한다. 초월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가르침은 선물을 또는 선물을 주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로부터 배우는 것’과 ‘-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후자는 가르침을 교육에 되돌려주는 것에 도움이 된다.
구성주의와 가르침의 종말
구성주의 교실은 학생 활동에 대한 강조다. 그래서 교수법으로 작동한다. 리차드슨은 “구성주의는 학습 이론이지 교수 이론은 아니다”라고 지적하였다. 교수에서 학습으로의 전환은 ‘학습화’ 현상의 일부이다. 이는 강의식 수업이나 소위 말하는 설교식의 가르침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교사를 단순히 학습의 촉진자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교육 그 자체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의 개념과 관련해 교수를 이해해야, 교수를 외부에서 급진적으로 오는 것, 학습자의 자아를 초월하는 것, 가르쳐지는 자를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가르침이 의미를 갖고 있다.
구성주의 교육학, 내재성, 그리고 학습의 역설
가르침은 내부에 이미 존재하던 것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부로부터 온 무엇인가를 더할 때 의미가 있다는 제안을 뒷받침한다.
초월을 생각하기, 생각을 초월하기
계시는 “교사가 학습자에게 내재하지 않는 지식을 주는 것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진리로 인지할 수 있는 조건 또한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자의 상황에서만 “교사와의 관계가 본질적인 것이 된다(웨스트팔)”
레비나스는 ‘자아의 능력을 넘어서’ 있는 타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좇는데, 이것은 ‘무한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가르쳐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가르침은 계시라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가르침의 선물 받기
가르침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사로부터 배울 때, 그들은 교사를 마치 책이나 인터넷처럼, 일종의 자원으로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배우는 경험은 누군가에 의해 가르쳐지는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가르쳐질 것인가 여부는 그 교사의 통제와 권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군가를 교사라고 부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직위 또는 직업을 칭하는 문제가 아니다.
결론
가르치는 힘은 교사의 소유가 아닌 그 무엇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사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 즉 본질적인 불신, 무력감 또는 나약함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교사가 학습을 위한 일회용 자원이나 불필요하 자원이 아니며, 학생에게 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어려운 질문들과 불편한 진실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무엇이 우리 삶에서 권위를 가져야 하는지 탐구하기 위해, 바라는 것과 바람직한 것을 구별하려고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애를 쓴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학생 개인과 그들의 바람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일 뿐 아니라 교사의 공적인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 개인의 ‘욕구’를 공동으로 합의된 ‘요구’로 전환하는 광범위한 민주주의적 변형과 다시 연결시키는 문제이다. 만일 누구든 원한다면 어디에서나 배울 수 있지만, 학교를 진정한 학교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가르침을 위한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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