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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노근리 이야기 1, 박건웅 저, 새만화책

나무와 들풀 2016. 6. 18. 11:34

노근리 이야기 1

 

박건웅 만화, 정은용 원작 새만화책 출판, 30000원

 

 노근리는 경부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영동에서 대구 가는 그 사이, 영동 쪽에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경부선 옆으로 철길이 나있고 그 철길 주변과 철길 밑의 쌍굴에서 그 근처 주민들 500여명이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란 믿음으로 미군에게 끌려가 3박 4일 동안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철로 밑 쌍굴에서 무차별 학살을 당한 그 곳 사람들의 기록이 노근리 이야기다.

 들풀이가 6학년 때, 어린이 통일 선봉대로 6박 7일 동안 캠프를 보낸 적이 있었다. 어린이 선봉대는 우리 나라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통일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선봉대 활동을 통해 들풀이는 노근리도 갔다 오고, 대추리에도 갔다 왔다는 걸 알았다. 늘 과묵한 들풀이는 나에게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디를 갔다왔는지를 그때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활동을 통해 들풀이는 외세, 특히 미국의 본질을 깨달은 듯 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둥둥 떠돌아다니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815기념 행사인 것 같았는데, 행사 도중 사회자가 어린이 통일 선봉대가 참석했다고 소개를 했고, 뒤이어 어린이들이 무대에 주루룩 섰다. 대표인 듯한 어린이가 선봉대 활동을 소개했는데 대충 내용이,

 '어린이 통일 선봉대로 노근리도 갔다 왔고, 대추리도 갔다 왔다. 거기서 미군의 만행도 똑똑히 들었다. 어서 우리 민족끼리 통일해서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 하는 어린이가 바로 들풀이었다. 이런 놀라울 데가..

 그 후 들풀이는 중학교에서 통일 글짓기를 하면 항상 그 선봉대 활동을 소재로 글을 쓴다. 본인이 직접 느끼고 본 것을 소재로 쓰기에 글짓기는 이러 저러한 상을 타기도 했다.

 몇 년 전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겨레 신문에서 노근리 학살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다. 당시 그 사건에서 총질을 했던 미군이라고 했던가? 백발의 노인이 돼서 눈물을 닦으며 당시 상황을 그려내고 참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기사에 적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알량하고, 치졸한 것이던가? 지금 노근리에 대해 기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로 단 한 줄짜리 멘트를 하잖는가!

 3박 4일 동안 피비린내나는 굴 속에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죽어갔던, 겨우 살아남았던 사람들에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는 얼마나 부끄러운 고백인가?

 이 책은 정은용 노근리사건대책위원장의 이야기를 박건웅 화백이 만화로 그린 이야기다.(그렇게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 만화 중간 중간엔 그 사건을 직접 겪으면서 구사일생을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 나온다.

 만화지만, 증언을 토대로 했기에 실제 이야기가 살아 있다.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에 이야기보다 그림이 더 머리에 남는다. 슬프고도 억울하고 또 기막힌 이야기다.

 지금 50년도 더 된, 6.25 때 있었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잊혀져서는 안 된다. 영원히 우리 마음에 남아, 억울하게 구천을 떠돌아다닐 그들의 한 맺힌 죽음이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우리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근리 사건 : 한국 전쟁 발발 1개월 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발생한 피난민 대량 학살 사건이다. 당시 미 제 1기갑사단과 인근 미 제 25 보병사단에서는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전선을 통과하는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950년 7월 25일 늦은 밤, 당시 피난민들은 500-600명 되는 사람들이 임계리 산속 마을로 피난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모두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부산 방면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주겠다고 하여 강제로 소개시켰다.

  25일 늦은 밤부터의 피난 행렬은 26 아침 무렵 하가리에 도착하자 인솔하던 미군이 길을 막고 피난민들을 모두 하천변으로 내리몰아 강제로 노숙시켰다. 한편 이날 밤 미 제 1기갑사단에 퇴각 명령이 떨어져 미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한밤중에 최소 7명의 피난민이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미군의 지시에 따라 하가리 하천 변에서 밤을 새운 피난민들은 동이 터오자, 미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남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했다.

 26일 정오 무렵 하가리를 출발하여 서송원리 부근에 이르자, 5-6명의 미군이 나타나 정지 명령을 내리고 경부 국도와 평행으로 달리는 경부 철도로 올라가 남쪽으로 향하도록 지시하였다.

 26일 정오에 이르러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미군들은 다시 이들을 저지하고 몸 수색과 소지품 검사를 한 후, 급히 사라졌다. 그 후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철길 주위에 모여있던 피난민들에게 폭격과 기총 사격을 가했다. 이 무렵, 지상군도 총격을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00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26일 - 29일 아침 공중 공격과 지상군 총격에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로 노근리 마을 앞 쌍굴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만 3일간 미군은 피난민이 모여 있는 철길 밑 쌍굴 앞뒤에서 주기적으로 총격과 포격을 가했다. 생존자들은 쌍굴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또는 쌍굴 속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최대 400명에 이른다고 증언했다.

 지금까지 미 국방성 조사반에게서 미군이 노근리 민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조선인민보>믐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