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나무

<침이 고인다> 김애란, 문학과 지성사 본문

<침이 고인다> 김애란, 문학과 지성사

나무와 들풀 2019. 9. 24. 15:59


단편소설집

$ 도도한 생활

  빗줄기는 거세졌다 잦아지길 반곡하고,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나는 피아노를 치고, 발목이 물에 잠긴 채 그는 어떤 꿈을 꾸는지 웃고 있었다.

 

$ 침이 고인다

 어스름한 모니터 불빛 때문인지 쌉싸래한 인삼 맛 때문인지 껌 씹는 그녀의 표정은 울상인 듯 그렇지 않은 듯 퍽 기괴해 보인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고, 울릴 리 없는, 깊고 깊은 밤이다. (껌 -인삼맛 껌)

 

$ 성탄특선

 사내가 고개 돌려 동생을 바라본다. 소리 없이 잠든 모양이 꼭 죽은 것 같다. 사내는 말업이 누워 있다, 손가락으로 동생을 툭 건드리며 한마디 한다. "야, 화장 지우고 자.'


$ 자오선을 지날 때

 계속 원설ㄹ 넣을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는 모르겠다. 시간은 자꾸 가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뭘 했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는 계속 학원에 나가야 된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경쟁력이란 '손가락 열 개 달린'정도의 평범한 조건들이었을까.


$ 칼자국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다 쓰러졌다. 제때 불을 못 맞춘 국수물은 우르르 넘고, 가스 불은 꺼지고, 홀에서 손님들이 달려왔다고. 바닥엔 숟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죽기 전,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 기도

 사내는 고맙다고 말하며 방향을 튼다. 나도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러다 잠시 후 걸음을 멈춘다. 273번이 혜화동가지 가기는 하지만 성균관대학교 바로 앞에 서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돌아보니 사내는 너무 멀리 가 있다.


$ 네모난 자리들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둡고 아무것도 없어요?" 어머니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있기 위해서였다고.


$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아이는 천천히 블랙박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블랙박스의 차가운 볼을 만졌다. 아이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고개 숙여 블랙박스에게 입 맞췄다. 다음 생엔 좀더 부드러운 물건으로 태어나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