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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철학자와 늑대/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나무와 들풀 2024. 8. 7. 08:59

철학책을 읽었는데 소설 같았다. 처음엔 책을 잡은 손을 놓지 못하더니 뒷부분에선 감동이 밀려와 눈물까지 났다. 철학책인데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느낌은 주인공인 개 같은 늑대 때문이었다. 그 늑대의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철학자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 경험이 감동을 자연스럽게 끌어낸 것이리라.

나에게는 16년째 같이 살고 있는 늙은 개가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퇴근했을 때, 그 개가 보이지 않으면 소스라치게 놀라 화장실로 달려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개가 숨을 쉬는지 확인한 후 안도하는 내가 보였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정의했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준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72쪽)

개를 존경해야 하나?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발걸음을 옮기는 게 서툴러 거실 바닥을 미끄러지며 내게 걸어오던 네 발 달린 그 어린 생명이 어느 날부터 노쇠하여 귀가 들리지 않아 잘 짖지도 않고, 눈까지 멀어 잘 못 보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의 죽음을 마음 속으로 준비하며 같이 있는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개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개가 떠난 후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개에 대한 추억과 그 속에 도덕적인 태만에서 기인하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 그런 애를 쓰는 동안 동물이 반려인에게 갖는 깊이 있는 사랑과 늙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글쓴이의 늑대에 나의 개를 지나치게 겹치며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뭐를 하든 자기 경험을 깡그리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생각을 넘어 감정까지 쏟아졌다.

글쓴이의 늑대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기 위한 아주 좋은 장치다. 정확히 인간과 늑대는 반대이기 때문에. 계약과 속임수를 쓰는 인간과 거짓말을 못 하는 늑대.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이 동물에 비해 인간의 못 된 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다. 저자는 인간의 특성을 여러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그 설명 속에는 동물에게는 없는 사악함에 대한 설명도 꽤 길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적 지능 가설에 따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높은 지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능의 핵심으로 속임수와 계략을 꼽는다. 인간의 사악함을 알고 싶다면 솔로몬, 카민, 그리고 와인이라는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도구인 왕복 상자를 보면 된다. 우울증의 원인이 절망의 반복 학습이라는 소위 ‘학습된 무기력’ 모델을 증명하기 위해 30년간 개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 전기고문을 가했다. 인간이 한 동물 실험이 왕복 상자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사악함을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했다.(136쪽) 늑대에게는 사악함이 없다.

많은 철학자들은 행복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한다. 행복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행복이란 감정을 좇는 인간은 영원히 그것을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나고 노이로제에 걸린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미래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본질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묶여 있는 존재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우리는 새롭고 평범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화살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어떤 작은 일탈에서라도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란 변하지 않는 것, 똑같은 것, 영원불변한 것,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우연성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292쪽)는 것을 늑대나 개는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늑대와 달리 인간은 행복을 그토록 찾아 헤매지만 행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우리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인간에게 매 순간은 미래라는 시간으로 끝없이 유예된다. 위대한 목표를 달성한 순간도 즐기지 못하고 다음 목표를 세우고 있는 영장류는 항상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살다 보면 힘들고, 차갑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삶을 살아 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들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담대한 도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331쪽) 미래로 유예된 행복을 찾는 어리석음이 아닌 현재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브레닌! 위대한 철학자의 늑대여! 내 삶이 움츠러든 지금 나는 너를 만나 그 어떤 도전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