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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민음사, 1996

나무와 들풀 2022. 10. 14. 22:17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민음사, 1996

 

논문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논문이란 형식성의 체계.

첫재 논문이 우리들의 의식사(학문사)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글쓰기 형식이 아니며, 둘째 논문과 학자(의식) 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일방적(논문학자)이며 타율적이라는 점이다.

논문의 불행은 복잡한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의 경직된 스타일 속에 담을 수 있다는 독선적 태도에서 연유한다.

무릇 의미와 가치는 컨텍스트의 역사와 터에서 생기는 법이고, 또 우리 삶이 마당이 의미와 가치의 연계망이라면, (의 복잡성)을 컨텍스트(의 복수성과 역동성)의 관점에서 풀이하는 것은 매우 뜻 있는 작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전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교실 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원전 고착의 행태는 무엇보다고 <교과서>들이 행사하는 구심력과 그 패턴에서 드러난다.

대개 성숙은 담장을 넘겨다보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이로서 이웃의 차이들과 그 다양성에 노출되는 모험과 긴장이 배움의 중요한 과정으로 정착된다.

 

기지촌의 지식인들(탈식민성과 우리학문의 자생성)

대체로, 좋은 글은 <역사>의 흐름이 만든 힘에서 솟아나는 법이다. 글쓰기의 세월이 쌓여가고, 또 지속적으로 변용˙진화되어 가는 글쓰기의 패턴을 통해서 부단히 글이 조율되면서, 내 글이지만 꼭 내가 썼다고만 할 수 없는 묘한 느낌에 빠지는 경우가 잦아진다는 것이다.

인문학자의 글은 인문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터와 역사 속에서 몸을 끌어본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 수입된 테크닉 속에는 탈근대와 해체의 담론들이 눈부시지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장에는 봉건과 미성숙한 주체들이 변함없이 허우적대고 있다.

대체로 제도라는 그물망은 쓸모없는 뼈다귀들만 솎아내고 정작 귀중한 살점들은 다 걸러내 버리는 그릇된 타성을 계속할 뿐이다. 앎과 삶이 서로를 경계하는 긴장 속에서야 대화의 창의성이 가능해지는 법인데, 각각의 위계 질서를 폐쇄적으로 유지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소통으로는 대화가 가능해지지 않는다. 세계화란 집을 나선다는 뜻인데, 집을 나서는 놈이 제 자신부터 명확히 해두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남을 만나서 제 집의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집짓기, 글쓰기, 마음쓰기(탈식민성의 걸음걸음)

역사성과 컨텍스트성의 후원이 있어야 글은 생명력을 얻는다.

 

글쓰기, 복잡성, 일리(一理)

과학적 합리성의 비결은 결국 <단순화>로 집약된다. 수학주의에 근거한 단순화의 과정에 적법하게 걸러지지 못한 채 제거당한 모든 복잡성들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했던 편견이야말로 서구의 과학주의 속에 내재한 박해의 논리였다. 대체로 진리란, 대화를 잃고 죽어 뻐드러진 일리가 기득권의 금테를 두른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없는 일리>는 있을 수 있지만, <일리 없는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복잡성과 잡된 글쓰기;글쓰기의 골과 마루

<자신의 집을 자신의 손으로>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말로써 옮길 수 있는 글쓰기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와 세상의 만남과 그 창조적 긴장이 글쓰기인데, 나를 체계적으로 없애버린 글쓰기를 형식성이나 객관성이라는 유물을 빌미로 답습하는 짓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글쓰기의 지방 분권적 태도는 우선 경험에 공평하려는 자세를 요청한다. 적용의 주변 역학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의 임상성에만 매달리는 태도가 때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보수적 맹목으로 흘렀다는 사실을 역사는 드물지 않게 증언한다.

요컨대 인문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변화>이다. 골과 마루의 글쓰기는 원리로서의 일리들이 진리로 고착되지도 않게 하고 무리로 비산하지도 않게 하는 긴장과 탄력성 있는 글쓰기. 이 원리들이 삶의 구체적 현장 속에서 어떻게 풀리는지를 면밀하고 상세하게 밝혀주는 글쓰기. 이것이 내가 말하는 <골과 마루의 글쓰기>이다.

 

복잡성, 컨텍스트, 글쓰기

울음은 흔히 복잡성의 궤를 타고 들어오지만, 웃음은 흔히 단순성의 궤를 타고 나가기 때문이다. 긴 설명보다 단순한 묘사가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드문 경험이 아니다.

컨텍스트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란, 자신이 생각이 의미 있게 주장될 수 있는 지평과 그 층위를 적절히 제한하지 않고 모든 지평과 층위를 총망라하는 거대 컨텍스트로 부당하게 확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문제시하는 점은, 힘을 얻는 몇몇의 컨텍스트들이 자신의 권한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고 이로써 다른 컨텍스트들을 지배하려는 일반적 경향이다.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적 교리, 근세의 계몽된 문명을 지배했던 과학적 합리 등은 자신의 컨텍스트에 전권을 부여함으로 컨텍스트의 단일성을 통해 독재 권력을 행사했던 전형이다. 컨텍스트의 복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다머의 설명처럼 지평이란 한 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각권이라고 볼 수 있다. 컨텍스트의 복수성에 대한 감각은 사이비 문제들과 사이비 언쟁들을 보다 원천적으로 해소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짓은 배움의 도정에 선 사람들이 정히 할 일이 아니다. <개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글쓰기의 방식. 개성이란 작가 자신의역사와 그 색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작가를 포함한 텍스트 일반의 그것을 포함시킨 말이다.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서로 교접하는 지역이야말로 텍스트의 개성이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인 셈이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컨텍스트들을 죽어 자빠진 것 같은 글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글은 단순화하고,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표준화하고, 과장과 왜곡을 일삼는 스스로의 특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은 복잡성을 일리로 풀어놓은 것이다>

 

컨텍스트의 해석학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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