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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선순환, 2021년, 18,000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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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윤혜 옮김, 선순환, 2021년, 18,000원

나무와 들풀 2024. 2. 15. 09:39

 

"이러다간 다 죽어"

“진정 부유한 나라는 노동시간이 하루에 12시간인 나라가 아니라, 하루에 6시간인 곳이다. 부란 잉여노동시간을 좌지우지하는 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과 사회 전체가 직접적인 생산에 필요한 시간 외에 이용할 수 있는 시간에서 생기는 것이다.”(324쪽) 마르크스의 이 말은 한 사회의 부는 의∙식∙주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어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의 양으로 측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집단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고, 지금이 바로 그런 대안적인 사회의 건설을 진지하게 생각할 순간이 아니냐고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왜 그 순간이냐 하면, 미 국립해양대기청에서 발표한 그래프에서 대기에 포함된 탄소 농도가 현재 400ppm이 넘었다는 사실에 있다. 과거 80만 년 동안 지구 대기의 탄소 농도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300ppm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는 300이 보통이었고 그 후 60년 동안 300에서 400이 넘는 수준을 보이고 있다.(230쪽) 이 사실은 우리가 탄소 배출 증가율을 살피고 제어할 것이 아니라, 대기 중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온실가스 농도의 절대량을 살펴야 할 때라는 것을 말해 준다.(236쪽)

환경문제로 인한 지구종말론에 회의적이었던 저자는 이 데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아 지금껏 견지해 오던 입장을 바꿨다. 즉 온실가스의 배출을 제어하고 억제하는데 그치지 않고, 대기 중에 있는 탄소를 잡아서 원래 있던 자리인 지하로 가두는 방법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지구 종말은 바로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는 현재 사회에서는 지구온난화와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없으며, 줄인다 하더라도 이미 절대량을 넘었기 때문에 대기 중에 있는 탄소를 잡아서 원래 있던 자리인 지하로 가두는 방법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라는 것이다.

몇 년 전 <팩트풀니스>(한스로슬링 지음)를 읽고 도무지 동의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지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이었다. 한스 로슬링은 인류 역사의 중요한 일들을 변화율 그래프로 보여주며 우리 미래가 현재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지 않으며, 발전된 기술과 문명으로 연대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동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있었고, 그게 변화율과 총량이었음이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총소득 3%의 증가율은 하위 10%에겐 1주일에 스타벅스 3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이지만 상위 10%에겐 같은 기간에 건물 몇 채를 구입 할 수 있는 힘인 것. 그 힘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으므로 자본축적과 자본구조에 함몰된 사회질서에서 벗어나, 훨씬 더 사회적이고 협동적이며 급속한 자본축적에 휘말리지 않는 사회로의 전환을 그려봐야 한다는(228쪽) 저자의 주장에 심적으로 동의가 된다.

자본주의는 기술 자체가 사업이 되므로, 기술혁신에 과학기술의 적용과 새로운 지식 창출이 필요하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벌써 알아차렸다. 이러한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MIT와 캘리포니아공대 같은 새로운 연구기관이 설립되어 시장에서 이기는 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동성은 결정적으로 영속적인 기술 혁신에 달려 있다.(321쪽) 결과적으로 신기술인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활용으로 만들어진 노동 생산성의 증가와 감소한 노동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란 것.

마르크스는 이 순간을 “자본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노동과 에너지 소비를 감소시킨다. 이런 현상은 해방된 노동에 이익이 될 것이며, 노동 해방의 조건이다”라고 하여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이나 자동화로 생겨난 잉여노동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생각하고 필연적 영역(의, 식, 주)이 충족된 상태에서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집단적 행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과업에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업도 필요하기에 노동자들은 자신도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했다.(316쪽)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28쪽)이므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구호이다. 이 구호가 주창된 지 시간이 좀 지났으니 ‘변화된 노동자여 단결하여 행동하라’로 표현하면 저자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