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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자가 쓴 조선의 민속놀이, 도유호 외 씀, 주강현 해제, 푸른숲 본문
『북한 학자가 쓴 조선의 민속놀이』
도유호 외 씀, 주강현 해제, 푸른숲, 1999
박현숙 발췌
우리 민속놀이는 인민성이 풍부하다. 그것은 대부분의 놀이가 인민들이 창작하여 그들 자신이 놀고 즐긴 것이기 때문이다. ‘씨름’, ‘그네뛰기’가 민족적 놀이로 오랫동안 대중 속에서 널리 보급되었던 것들 거의 대다수의 놀이는 인민의 일상생활과 불가분의 연계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놀이들은 놀이 방법이 쉬우면서도 내용이 풍부하며 흥미진진하다. 따라서 우리 나라 민속놀이에는 착취 계급의 부화(浮華)하고 투기적이며 타락한 기분을 반영한 것은 없다.
우리 민속놀이는 건전한 취미와 높은 문화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민속놀이는 노동의 즐거움과 생활의 기쁨을 반영한 것이 많다. 그리하여 일터에서는 사람들의 일을 더 흥겹게 했고 나라를 보위하는 싸움터에서는 모두가 단결하여 용감히 싸우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민속놀이들은 집체적(集體的) 성격이 강하므로 단결과 친목의 고상한 품성을 기르는 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우아한 <강강수월래>나 <쾌지나 칭칭 나네>는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인민들에게 단결과 투쟁의 기운을 불러일으켰으며, 아동들의 유희인 ‘단심놀이’는 일제를 반대하는 간고한 투쟁 시기에 각계각층 대중을 항일 투쟁으로 단결시키고 궐기시키는 데 고무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민속놀이에는 인민들의 집체적 지혜가 깃들여 있다. 그리하여 대중의 지혜에 의해 세련되고 향기 높은 문화성과 고상한 취미가 반영되어 있다. 평범한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꽃 시절의 한때를 즐긴 ‘화전놀이’에도 시가가 있었고 농사꾼들이 즐긴 ‘활쏘기’에도 은근한 예절과 고상한 인품이 깃들여 있었다.
우리 민속놀이는 낙천적인 기상과 풍부한 정서가 흘러넘친다. 우리 인민은 호미와 낫을 북채로 바뀌어 쥐면 누구나 북 장단을 칠 줄 알았으며, 춤판이 벌어지면 모두가 그 속에 뛰어들어 한바탕 춤을 추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다. 또 운동 경기나 겨루기를 놓고 보더라도 기교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놀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침착성, 대담성 같은 훌륭한 기질을 배양하였다. 이러한 낙천적인 기풍과 정서는 생활이 풍만하고 품성이 슬기로운 인민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상한 정신적 재부다.
농악놀이
농악은 군중적이고 대중적인 놀이다. 한두 사람이 방안에서 노는 놀이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넓은 뜰이나 들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뛰고 달리며 노는 놀이다. 농악에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그것은 특별한 놀이 재주가 없어도 누구나 함께 어울려 흥이 나게 놀 수 있는 대중적인 놀이기 때문이다. 이 놀이는 근로 인민들이 오랜 집단생활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창조하였다.
모내기, 부락 공동의 건설 작업,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 지신밟기, 설, 단오, 추석, 유두, 백중, 씨름판, 동네 계모임에도 농악이 있었다.
이렇듯 군중이 움직이는 곳에 농악놀이가 벌어지고 농악이 벌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군중 놀이가 있었다.
우리나라 농악은 예술적이고 민족적 품격이 농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조선적인 정서미를 풍부히 가지면서 우리 인민의 낙천적이고 전투적인 기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농악소리를 한번 들으면 누구나 절로 벅찬 환희감과 용솟는 힘을 느낀다. 또한 농악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로 인민들의 화목한 분위기 속에 끌려들게 함으로써 집단의 단합과 용감성을 배양한다. 반면에 적들은 우리 농악소리에 압도되어 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공포에 떨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인민들이 동원되는 때에는 언제나 먼저 농악이 움직였다 봉건 사회에서 악독한 봉건 통치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과 일제 시기에 일어났던 각종 농민 투쟁에는 으레 농악이 앞장섰다. 유명한 갑오농민전쟁과 3‧1 운동 등 인민들의 혁명적 봉기에서도 농악을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악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 조선 사람을 영원히 제 놈들의 노예로 만들려는 야망을 가진 일제는 농악을 극력 금기하였다. 더욱이 일제 통치 말기에는 불가사리같이 쇠붙이에 허기가 난 놈들이 밥그릇, 숟가락까지 빼앗아갔으니 징, 꽹과리가 성할 리 없었다. 두말할 것 없이 선참(先站)으로 빼앗아간 것이 부락의 징과 꽹과리였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 인민들에게서 농악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등 놀이와 불꽃놀이
등 놀이를 우리나라에서 상대하여 놀기 시작한 것은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부터고 고려 시대에 와서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10세기에 고려 태조는 등 놀이를 포함한 팔관회와 연등회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였으며 그 후 이 행사는 고려조 전시기를 통하여 대단히 성행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등 놀이는 국가의 제전으로 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 대신 도시 상인들이 점차 큰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등 놀이는 그들이 주관하는 민간놀이가 되었으며 4-50년 전까지 여러 지방에 남아있었다. 등 놀이 때에 많은 지방에서는 불꽃놀이도 같이 하였다. 불꽃놀이에는 대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나라에서 큰 규모로 한 화산대였고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흔히 한 줄불, 딱총과 같은 것이었다. 화산대는 화약이나 기타 폭발물을 포 통에 재우고 그 마구리와 외피를 종이로 겹겹이 싼 다음, 속에 꽂은 심지에 불을 달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줄불은 숯가루, 솜 같은 것을 길게 만든 종이전대에 다져 넣어 나뭇가지에 달아놓고 밑엣 불을 달면 연속적으로 튀면서 찬란한 불꽃을 흩어놓는다 딱총은 류유황, 숯가루 같은 것을 버무려 알지게 포갠 것을 종이에 싸서 장난감 총에 재워놓고 방아쇠로 대려 소리 나게 하는 것이었다.
1413년(조선 태종 때)에 서울에 왔던 일본 사신은 처음 우리나라 불꽃놀이를 보고 그 요란한 불꽃에 겁을 먹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1539년 (중종 때) 에도 외국 사신들에게 불꽃 놀이를 보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외국 사신들은 한결같이 사람의 조화가 아니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화산대와 같이 규모가 컸던 것은 이미 그친 지 오래며 줄불이나 딱총 같은 것은 민간에 계속 남아 있으나 이것마저 일제가 금지하고 말았다.
널뛰기
우리나라와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만 볼 수 있는데 오키나와의 그것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이다. 1792년에 중국 청나라 사신으로 오키나와에 갔던 서보광(徐葆光)이 쓴 <중산전신록>(中山傳信錄)이란 책에 판 무희를 소개하는데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모방한 놀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일제 침략자들이 우리 조선을 강점한 시기에 놈들의 악랄한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말미암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씨름
씨름은 다만 민간이 놀이로서만이 아니라 무사들도 익혔다. 고려에서는 씨름 잘 하는 사람을 ‘용사’라 불렀으며 국가에서 씨름판을 벌이 왕이 열병(閱兵)의 뜻으로 나가보곤 하였다 . 이러한 씨름은 일제 통치시기에 박해를 받고 쇠퇴하였다. 군중이 모이는 것과 우리 인민들 속에 민족정신이 발양되는 것을 일제가 극도로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씨름, 수박: 양편이 서로 떨어져서 주먹질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 택견:발길질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 날파람:평양지방에서 있었는데 수박에 가까워 주먹을 위주로 하되 발로 차고 머리로 받기도 하여 택견보다 공격 방법의 범위가 더 넓은 놀이 등은 모두 옛날 인민들이 평소에 신체를 단련하고 부지런히 무예를 닦아 일단 유사시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창안한 경기였다.
줄다리기
처음에 작은 줄다리기를 아래 위 동네의 청소년들이 시작한다. 정초에 시작하여 12-13일경까지 진행되는데 그 기간에 두 동네의 풍물들이 동원되어 전투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두 동네 사람들의 신경과 감정은 오로지 이 줄다리기의 승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큰 줄다리기는 보름날이나 16일 날 진행하였다. 이것은 읍내 두 동네 사이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면의 동네를 포괄하였다. 상하 두 개 리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각 동네들이 한데 합쳐 편을 들게 한다. 원줄의 굵기는 5-60센티, 길이는 3-4백 미터에 달한다. 줄다리기가 이루어지는 부근에는 수천의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줄다리기를 시작되는 시각을 기다린다.
줄다리기는 아주 상쾌하고 신명나는 대중적 놀이 행사였다. 그런데 이상의 행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편 여러 동네의 전체 인원들이 굳게 단결하여 일치한 통일적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 향토를 사랑하고 대중적 승리를 위하여 노력하는 고상한 감정과 정신, 또 그에 필요한 방법들을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조선 인민의 총명한 예지의 산물이며 귀중한 전통적 유산의 하나다. 조선 강점 후 일제의 폭압에 의하여 조선 인민의 각종 우수한 전통적 관습들이 강제로 폐지되고 대중적 집회가 금지된 가운데서도 줄다리기 행사는 인민들의 억센 추동에 의하여 3.1 운동 이후까지도 여러 해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대중적 줄다리기를 한사코 강압하였다. 나중에는 소년들이 몇 명 모여서 작은 새끼 오리를 가지고 줄다리기 시늉을 하여도 마구 때리고 잡아가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경상북도 문경 지방이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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