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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본문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궁리 출판사
박현숙 발췌
1장 어떤 지적 모험
조제프 자코토는 네델란드어를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가르칠 언어가 없는 상황에서 공통된 어떤 것으로 된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맺어야 했고 당시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델란드어 대역판이 출간 된 것을 찾았다. 그것을 읽고 읽은 내용 전부에 대해 각자 생각한 바를 프랑스어로 쓰라고 했다. 결과는 완벽 그 자체였다. 이것이야말로 자코토의 정신 혁명이었다. 스승의 설명은 쓸데없는 것이었나? 그렇다면 누구에게 무엇에 쓸모가 있는가?
- 설명자의 질서
글에 대한 말의 역설적 특권, 시각에 대한 청각의 역설적 특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양한 지적 학습의 능률이 불균등하기는 해도 모든 인간 아이가 가장 잘 배우는 것은 어떤 스승도 설명해줄 수 없는 모국어다. (여기에 비고츠키가 스쳐간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 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설명은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둘로 분할한다. 열등한 지능이 있고 우월한 지능이 있다.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은 학생에게 설명한다. 이것이 자코토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의 원리가 될 것이다.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스승의 고민은 있고, 이해했는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 이 이해하지는 슬로건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 만들어지고 개선되고 이것은 바보 만들기의 진보가 된다.
우연과 의지
학생들이 그의 설명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배우려는 의지가 있을 때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하는 스승
학생이 배운 것은 스승의 학식이 아니었다. 자코토가 스승인 까닭은 그의 학생들을 그들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고리 안에 가둬두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학생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씨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책의 지능은 공통된 것이었다. 그것은 스승과 학생을 지적으로 평등하게 이어주는 끈이었다. 하나의 지능이 다른 지능에 종속되는 곳에 바보 만들기가 있다. 우리는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을 해방이라고 부를 것이다. 한 지능의 행위가 자신의 지능에만 복종하는 것이 해방인 것이다. 빠른 길이라고 해서 가장 좋은 교육의 길은 아니었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
역량의 고리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이 학습 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개인을 지적을 해방시키는 것. 가난하고 무지한 가장도 스스로 해방되기만 하면 어떤 스승의 도움 없도 자기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가르침의 수단.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2장 무지한 자의 수업/교훈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읽었다면 다른 것도 읽을 수 있다. 다른 것은 문학이 아니라 다른 것이어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다른 것을 선택-연결-하는 것은 스스로 배운 자이고, 그는 거기서도 그것을 만든 자의 지능과 만날 수 있고, 그 지능과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지능과 다를 바 없다.)
- 책의 섬
구식(설명으로 이끄는 앎)은 항상 둘로 나눈다.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 아이의 지능을 믿지 않는다. 언제나 아이는 스승의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다.
책을 주면 그것을 알아내기까지 빠져나갈 수 없다. 이것이 무지한 스승이 하는 일이다. 물어라. 내용이 무엇인지? 교훈이 무엇인지? 무엇을 느꼈는지?
-칼립소와 열쇠공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라는 말은 한 권의 책을 스스로 읽은 후면 다른 모든 것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시작하라) 구식은 어떤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고 그 시작을 학생 혼자서 할 수 없다고 하기에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스승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다. (답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모든 유식한 스승처럼 소크라테스는 지도하기 위해 질문한다. 무지한 스승만이 지적 해방으로 이끈다.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다.
-무지한 자의 힘
무지한 자는 더 적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이다.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관찰과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어머니의 직관’-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가르침 – 참된 이성이다. 이 이성은 무지한 자의 앎과 스스로의 무지가 서로 평등해지면서 지적 평등의 힘을 보여 준다 학식이 도움을 주지 않는 곳에서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한다.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무지한 자들이 할 수 있다. 무지에는 위계가 없다. 무지한 자들과 유식한 자들이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지적 존재의 힘이다. 무지한 자는 지속적인 물음으로 아는 자가 지속적으로 구하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다. 구하는 자는 항상 찾는다. 스승은 구하는 자를 그 길에 붙들어 주는 자다.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 각자의 길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 본인이 해방되어야 한다. (정신의 여행자- 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평등 속에 생각한다가 발현된다. 그래서 보편적 가르침은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 기술자가 일 하는 방식처럼 배우는 자도 배우면 된다. 일 하는 것과 배우는 것은 같은 지능이다. 그래서 무지한 부모일지라도 스승이 될 수 있다. 자식에게 무조전적인 요청, 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해방하려는 자는 무던한 교육자가 아닌 고집 센 스승이어야 한다.
- 장님과 그의 개
해방이란 평등에 대한 의식, 이 상호성(내가 해방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스스로 해방하고 싶은 의식을 갖게 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며,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닌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월한 자도 열등하게 만든다. 우월의 위계 질서 속에서.
-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하나를 스스로 하면, 그것을 한 방법으로 다른 것과 연결하여 해결한다. 그래서 하나는 전체이다.
제 3장 평등한 자들의 이성/자유
모든 지능이 평등함을 증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지능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두뇌와 잎사귀
그 어떤 것으로도 지능의 불평등을 증명할 수 없다. 다만 지적 발현의 불평등을 설명할 뿐이다.
주의 깊은 동물
지능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 지능은 쉰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지적 성과의 불평등은 의지가 불평등하게 절박하다는 것이다. 의지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심급이기에 앞서 스스로를 움직이고자 하는 역량,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역량이다.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생각)의 평등. 손과 지능은 저마다 자신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노예이고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다. 의지에 따라 손과 지능을 사용한다. 나는 내가 원할 때 관념들을 갖는다. 의지 없이 또는 반성 없이 행동해서는 지적 행위가 생겨나지 않는다. 백치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 능력이 부재하거나 잠자거나 멈춘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평등하지만, 각자의 의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른 것뿐이다. 의미작용은 의지의 작업이다. 바로 그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비밀이다. 이성적 존재는 먼저 자신의 역량을 아는 존재이자, 그 역량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존재이다.
진실함의 원리
사회, 사회제도, 사회가 추구하는 목표, 이것이 바람(의지)를 규정한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의 가장 무시무시한 형태를 대표한다. 혼자서는 못 한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언어
진리는 말해지지 않는다. 진리는 필연적이지만 언어는 자의적이다. 모든 언어는 똑같이 자의적이다. 생각은 진리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표현된다. 의지. 짐작하려는 의지. 의지는 의지를 짐작한다. 이 공통의 노력 속에서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로서 인간의 생각을 소통하길 바란다, 나의 지능이 기술을 가지고 임의의 기호들을 사용하자마자, 지능은 기호들을 조합하고 구성하고 분석한다. 이 모두가 의지의 효과다.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 그것이 없다면 어떤 인간도 결코 언어활동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역량이 ‘무지한’ 자로 하여금 ‘무언의’ 책에서 그것의 비밀을 뽑아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 나도 화가다!
인간이 알면 소통수단을 선택하고 이용하는 법을 검토하여 타인을 감동시키는 훈련을 할 수 있다. 그가 배워야 하는 것은 언어다.
시인들의 교훈
배워야 한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
이성은 이성을 가지려는 목적을 향해 정렬된 담론이 멈추는 곳에서 시작하며, 평등이 인정된 곳에서 시작한다. 이성과 의지가 동의어이듯, 평등과 지능은 동의어다. 지능과 평등은 인류를 이어주는 공통의 끈이자 인간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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