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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피투자자의 시간, 미셸 페어 지음, 조민서 번역, 리시올 본문
피투자자의 시간
금융 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
미셸 페어 지음,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들어가며 정치적 낙담의 여정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슘페터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기업이라는 법적 제도의 내생적인, 그리하여 불가피한 진화 때문에 쇠락한다고 보았다. (이런 전망과 별개로)
신자유주의 개혁가들(몽펠르랭에 모인 이론가)은 가장 취약한 인구 집단을 시장 경쟁에 내재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보다는 취약한 시장 메커니즘을 대중의 성급함과 이를 악용하는 대중 선동가로부터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통치의 과제라고 보았다. 또한 모든 유형의 공적 부조를 수혜자의 ‘게으름을 부추기지’ 않도록 낮은 수준에서 책정된 부의 소득세로 통합.
1970년대 후반 이후 서구 경제는 사회학자 제럴드 데이비스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묘사한 것을 통과해 왔다. 포드중의 시대처럼 산업 기업 중심이 아닌 거대한 종합 은행과 기관 투자가가 지배하는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금융 자본주의의 부상은 몰펠르랭 협회의 의제가 실행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빚어내고자 했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임노동자의 투쟁 대신 자본의 가치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투쟁 전선이 나타나고 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아닌 투자자와 피투자자가 갈등을 구조를 빚고 있으며 이를 활용하여 좌파의 우울을 떨쳐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1장 기업 거버넌스의 이해 관계
포드주의 시대에는 사회 진보와 자본 축적 모두 노동자와 피고용인을 열성적이고 구매력 있는 소비자로 구성한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용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윤과 임금의 선순환은 1960년대 후반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투자자의 반응이다.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되기 위해 투자자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신호가 임금을 삭감하고, 더 저렴하고 환경 오염을 유발하는 기술을 사용하며, 비도덕적인 노동 관행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하도급 및 공급 업체와 거래하고, 생산물의 품질을 느슨하게 관리하며, 세금을 ‘최적화’하는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확립하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영자는 없다. 그러므로 기업의 주주 가치를 유지하는 기술은 이해 관계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과 무책임한 관행을 통해서만 낼 수 있는 퍼포먼스들을 약속해 투자자를 유인하는 것을 동시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제 운동가들은 이들이 사회적, 생태적으로 무책임한 투자 방침의 위험을 재평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갈등이 전개되는 주된 장소는 노동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이 아니라 투기로 주가가 정해지는 시장이다. 이 투쟁의 주인공은 피고인과 고용주가 아니라 주주와 이해 관계자이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가치 평가의 페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투쟁해야 한다.
2장 정부 정책의 책무
1960년대 후반부터 무너지던 임금과 이윤의 선순환이 1970년대 통화주의 정책으로 전환하여 극복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독한 불황에 빠져버렸다. 1980년대 정책은 노동 조합에 맞서고 복지 프로그램을 삭감하며 공공재를 민영화하는 한편, 감세로 줄어든 세수를 금융시장에서 빌려왔다. 볼프강 슈트렉이 말하는 ‘조세 국가’에서 ‘부채 국가’로 이행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자본세와 법인세 인하, 사회 복지 프로그램 및 공공 서비스 예산 삭감, 노동 시장 유연화라는 세 영역에서 끊임없이 한 발짝 앞서 나가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대의 민주주의의 시민은 투표를 통해 주기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가진다. 이들은 선출된 지도자의 임기 동안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방도가 거의 없으며 공약을 저버린 대표자를 소환할 힘은 더더욱 없다. 반면 대부자가 자신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통치자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은 이와 매우 다르다. 이들은 국가 채권을 언제든 사고팔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실제로 시장 일각에서 아주 약간만 회의를 내비쳐도 정부의 대출 역량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재선을 담보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자워들을 정치인에게 앗아 가 버릴 수 있다. 통치란 대개 가장 시급한 리스크를 피하는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투자자의 바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늘 유권자의 기대보다 우선시된다. 지도자는 금융 시장의 명령을 거부하라는 위임을 받고 선출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허용된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전임자가 체결한 부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도, 자본 유출을 방지할 수도 없는 이 지도자들은 곧 자신이 투자자의 신뢰를 잃으면 종국에는 변화를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던 유권자의 신뢰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자본의 흐름을 막는 투쟁은 효과적이지 않다. 기존에 가졌던 축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 점차 흐려지고 있는 좌/우 측에 집착하는 대신 ‘약자들’과 ‘권력자들’-포데모스의 지도자들은 “카스트”라고, 월스트리트 점령 투사들은 1퍼센트라고 부른-간의 수직적 분할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보다 상하의 대립을 앞세우게 되면 중대한 결과들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좌파’는 정의상 극우파보다 중도파에 가까운 반면,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다르더라도) 처지가 유사한 ‘약자들’ 간의 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박탈하는 기득권층과 이들 전체 간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에 따르면 통치란 금융 기관의 특수 이익으로부터 인민을 수호하는 것보다 대안적인 특수 이익의 힘을 키워 금융 기관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인민 주권의 이름으로 위임된 권한을 이용해 신용 공급자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 공급자와 경쟁하는 압력 집단에 대한 선출직 공직자의 책임을 높임으로써 신용의 장 자체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포드주의 시대에 선출직 공직자는 적정 수준의 임금을 보장받으려면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뿐 아니라 이들을 고용할 정도로 이윤율이 높은 회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노동자에게) 설득해야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통치의 핵심은 대출 기한을 갱신하려면 채무를 상환할 수 있도록 평판을 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채권자들이 파산하도록 놔두어선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대출자에게 강조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채무자들이 과거의 조직딘 노동자를 모방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즉 ‘채무자’가 자신들의 공통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다음 새롭게 발견한 이 집합적인 의식과 연대를 활용해 신용 공급자에 대한 종속을 정당화하는 규범들을 폭로하고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혁명적 생디칼리즘처럼 집합적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채권 시장에 신세 지고 있는 공직자 및 금융 기관에 무시무시한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채무자의 해방은 채무자의 죄책감이라는 윤리적인 함의가 가진 오류를 폭로하는 데 달려 있다.
3장 개인 품행의 가치 상승
신자유주의적 포풀리즘이 불을 지핀 ‘민주적’ 분노의 주된 표적은 노동 조합, 공무원, 실업 수당 수령자였다. 그리하여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 국가 공무원, 구직자는 과거의 귀족만큼은 아닐지언정 성실하게 일하는 납세자에게서 부당하게 이익을 편취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1980년대 초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계급 적대를노동 착취에서 분리한 다음 특권 수혜자가 평범한 납세자를 약탈한다는 식으로 적대를 재규정했다.
20세기 말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같은 제3의 길 개혁가들은 실업자들과 빈곤층이 “그들이 스스로 돕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자부심을 잃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불안정한 조건에서 장시간 저임금으로 일하겠다고 동의하는 것도 자아 존중감과 타인들에 의한 (개인의) 가치 상승이 선순환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노동 조합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고용 조건에 적응하도록 돕는 역할이 요구되었다. 공무원은 시대의 노무 관행을 특징짓는 등급 평가와 인센티브의 문화가 국가 서비스에도 도입되었다. 정부의 역할은 시민의 지속적인 교육에 투자하고 이들이 계약하는 대출의 보증을 서는 것, 뿐만 아니라 실업 보험을 존엄성을 끌어올리는 일터로의 복귀 프로그램으로 바꾸고 금융 기관을 통해 신용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오늘날은 제3의 길을 초기에 주창했던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다. 정부는 채권자의 가치 평가를 받기에 적합한 거주자를 갖추기 위해 갖가지 기술을 따로 혹은 한꺼번에 활용한다. 소위 가치 상승이 불가능한 인구 집단이 자국의 금융적 매력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 하나는 혜택 신청자의 수급 자격 기준과 통제 양식을 변경해 실업자, 병자, 장애인 노동자 등을 명부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또한 국가 당국은 영토 거주 조건을 수정해 즉각 가치가 상승할 자원이 없는 이민자를 몰아내고 부유한 외국인이나 조세 도피처를 물색하는 초국적 기업을 유인하는 데도 무척 적극적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1990년대에 접어들어 프레카리아트가 생겨났다. 그들은 불안정한 일자리가 주로 공급되고 사회 복지 혜택은 줄어들며 노동 조직은 약화되는 암울한 상황에 던져진 원자화된 임노동 계급을 가르킨다. 임노동자들은 ‘플랫폼 자본주의’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통치와 거의 무관하며 오히려 전통적인 의미에서 시민의 ‘고용 가능성’을 촉진할 책임을 정부에게서 면제해 주는 체계다.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변화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인 플랫폼 자본주의의 도래는 또 다른, 어쩌면 한층 ‘파괴적인’ 변형을 촉발하고 있다. 고전 자유주의자들이 구상했던 시장은 상인과 고객이 자유롭게 거래에 임할 수 있는 중립적인 공간으로 기능했지만, 이런 디지털 인터페이스들은 실제로는 노동 과정을 모니터링하며 플랫폼을 이용하는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보수를 정해 놓는다. 대부분의 경우 플랫폼과 ‘파트너십’ 관계를 맺는 불안정한 노동자는 노동 조건의 개선을 경험하기는커녕 임노동에 따라붙는 제약과 자영업에 수반되는 리스크가 뒤섞인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해 관계자들이 무엇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으로 셈해질 수 있는지를 정의하는 주주들의 권력에 도전해야 하는 것처럼, 시민은, 더 낫게 표현하면 사회적 채권자들은 정부가 고용에 기반한 보호 장치와 복지 혜택의 매력적인 대체물이라고 금융적 채권자들에게 선전하는 것, 즉 인적 자본 가치의 상승이라는 유인을 표적으로 삼아 투기해야 한다.
프랑스 배달 기사들의 조합을 조직한 제롬 피모의 제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기진 않았지만 이들은 협동조합으로 탈중개화를 모색하게 한다. 협동조합 운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디지털 시대에 협동조합 운동은 벤처 자금의 유입이 없더라도 훌륭한 어플리케이션과 최소한의 투자금만 미리 확보하면 착수하기에 충분하다.
우버화라는 전망은 이미 플랫폼 자본주의 영역을 넘어 광범한 직업군에 스며들고 있다. 노동이 임시직화가 고등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관행이 문화 산에 만연해 있으며, 수많은 저널리스트, 번역가, 디자이너, 공예가가 도급 계약으로 보수를 받는다, 이 새로운 직업 환경의 특징인 고립과 취약성을 상쇄하는 방안으로는 프리랜서 단체를 형성하는 데 관여하는 것이 공공 혹은 민간 기관에 더 많은 종신 고용 계약을 요구하는 것보다 유망해 보인다.
코다
자본주의 황금기를 지나 금융 기관이 지배적인 세력으로 등극하면서 새오룬 우선 순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자사 주식의 등급 평가에 목을 매고, 공직자는 채권 소유자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가계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의 노동 운동이 주로 노동자가 창출하고 자본 소유자가 전유하는 잉여 가치의 재분배를 놓고 투쟁했다면 오늘날의 투쟁은 신용 할당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신용은 정의상 타인에 의해서만 공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용의 가치를 어떤 가치로 선점하고 그 흐름을 바꾸느냐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피투자자 운동가들에게 적합한 슬로건은 아마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일 것이다.
미셸 페어와의 인터뷰
(신자유주의 이후 금융 자본주의로 전환이 이루어지며 신자유주의 시대 시카고 학파 중심의)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인적 자본을 가능한 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는 일종의 공장이 아니라 최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자산 포트폴리오로 간주합니다. 금융 자본의 우세가 의미하는 바는 금융화된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규칙에서는 고용주가 아니라 투자자가 지배적인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핵심 질문은 투자자가 돈을 벌기 위해 상대하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에요. 그 대상이 바로 피투자자입니다. (여기서는 투자자 대 피투자자의 새로운 계급 투쟁을 사고해 보자는 제안이 이 첵에 담긴 논지의 전반적인 골자입니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이윤이 아니라 신용의 극대화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작동합니다. (또한) 무시무시할 정도로 흥미로운 지점은 경제적인 것과 비경제적인 것이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입니다.(여기에 투쟁의 지점이 있다.)
옮긴이 후기
미셸 페어는 금융의 전일적 지배가 관철되는 듯이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금융에 대항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는 것이다. 그 정치를 전개해 나가는 주인공을 ‘피투자자’로 호명한다. 피투자자의 주체성은 새로운 통치성이 작용하는 접면이자 특유한 정치적 예속과 저항의 가능성이 교차하는 장소다. 좌파 정치의 전략 역시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한다. 은행을 벤치마킹해 국가 통치에 영향을 발휘하는 시간을 점유해야 한다. 시민으로서 자신에 대한 책무를 다하라고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사회적 채권자’라는 지위를 활용해야 한다.
또 하나는 약탈적 플랫폼에서 ‘이탈’한 서비스 제공자들이 플랫폼 협동조합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목표는 변화하는 자본주의에 조응하며 부상하고 있는 운동 흐름을 자신이 고안한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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