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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들뢰즈의 정치-사회 철학, 신지영, 그린비, 2023 본문
들뢰즈의 정치-사회 철학
통제 사회에 던지는 질문
신지영, 그린비, 2023
푸코는 18세기와 19세기를 규율사회라고 보았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후 푸코가 진단한 규율은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하던 새로운 힘에 의해 위기에 처한다.(8쪽) 우리는 푸코가 말하는 감시사회, 공장의 시대를 지나 물류센터의 시대, 플랫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인터넷 연결망과 SNS, 무한한 개인 채널들이 있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정보의 공개와 확산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SNS를 통해 이론적으로 무한한 연결에 노출되어 가능한 한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보를 무한히 노출하며 바로 그것 때문에 제한당한다. 즉, 규율사회를 대체하고 통제사회에 들어섰다.
규율사회에 뒤이어 등장한 통제사회의 핵심은 ‘경쟁’과 ‘성과급’이라는 기업의 ‘영혼’이 가스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개인들을 잠식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반대하는 정책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했다. 가스와 같이 나에게 스며들어 와 있는 기업의 영혼이 나 자신도 인식 못하는 사이에 나의 전모를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이미 경쟁과 성과급을 욕망하는 기업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상대평가는 합리적 과목 선택을 방해하고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우리 모두 일사분란하게 ‘이익’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른 개념들이 배열된 그런 정신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의 영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외면하게 만든다. 내 공부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못해야 한다. 정신 상태는 강퍅해지고, 남는 것은 폐허뿐이다. 모든 환경이 안정적이고 스스로 우수하며 우연히 옆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던 상위권 학생들을 제외하면, 3년 동안의 성적을 기록하는 내신은 정말 잔인한 장치이다. 학생들은 3년간 불안과 공포에 내던져진다. 학생부를 보기 훌륭하게 관리하는 것과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살 만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이 통제의 체제를 자연스럽게 즐기고 또 요구하는 젊은이들. 이 체제의 목적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발견하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라고.
서론
들뢰즈의 질문. “경제적 양극화는 왜 정치적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왜 같은 비율의 정치적 양극화, 곧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정치적인 진영의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
디지털화, 인터넷, 위성, 통신 등등 현대사회의 조건들은 공간과 관련한 현대인의 사유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통제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질문들, 그것은 이 새로운 시공간의 창조 가능성, 민중의 가능성에 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1장 이념과 유물론
들뢰즈의 철학 차이-존재론은 우리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들, 언어와 같은 표상들, 주체나 대상과 같은 존재들, 지시 가능하다고 여기는 모든 사물들 등의 존재들이 사실은 끊임없는 운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존재론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실천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은 하나의 함정일 뿐임을 밝혀 보도록 하겠다.
사회는 모순과 적대가 아니라 흐름과 도주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인은 사회의 생산과 분리된 생산주체가 아니라 개인의 망상이 사회의 망상에 겹쳐서 생산한다는 통찰이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실재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겠냐고,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 둘은 통합하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점차 두 계급은 실재로 ‘부르주아’로 통합된다는 것으로, ‘노동자’ 계급의 소멸.
(가장 단순한 유물론에 대한 반박.) (인간 세포가 7주년을 주기로 한차례 완전히 교체된다는 생각) 그러나 낡은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될 때, 그 새로운 세포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세포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를 관할하는 어떤 힘의 일관성 속에서 생긴다는 점이다. 우리는 나, 우리, 사회, 세계가 맺는 관계, 그 관계 때문에 유발되는 수많은 문제에 둘러싸여 있고, 뭘 하든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문제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각 정당은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모습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모습이다.
2장. 자유와 자본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시장경제에 알맞은 경쟁을 위한 공간 확립으로 정의했다. 정부는 경쟁이 활성화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 개인은 하나의 자원으로서 인적자본이 된다. 인간기계. 기계처럼 수명을 늘리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관리하며 ‘자기 자신’이라는 자본을 가장 높은 가격에 가능한 한 가장 오래 파는 ‘기업가’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노동자나 사용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구성 부품이 되기 때문에 기계의 재발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역시 이미 인간에게 봉사하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으며, 말 그대로 빅테이터는 인간의 소비, 행동, 생각에 스며들면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 존재가 되었다. 푸코가 개인을 인적자본으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유지하여 가능한 한 오래 가종 높은 값으로 스스로를 시장에 파는 기업가라고 바라보는 것처럼, 들뢰즈는 우리가 모두 보편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라고 본다.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누더기’를 걸친 자본가들‘인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자유로이 사고판다는 환상 속에서, 즉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개인은 자유주의를 무한히 지지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 개인들은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통계적 인간, 평균적 인간, 기준으로서의 인간으로 수렴해 간다. 이렇게 수렴된 인간이 ’인구‘이다. 인구를 이류는 “적어도 하나의 불변항”은 바로 ’욕망‘이다. 인구와 욕망은 푸코에게서 한 쌍이 된다. 이미 포획된 존재. 욕망은 이윤의 갈망으로서의 욕망. (들뢰즈는 이런 인구들을) 우리 시대의 개인은 이제 저항할 대상도 없고 저항할 원리도 잃어버린 셈이다.(라고)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윤리로 만들겠다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것은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가리지 않고, 경쟁이 최고의 덕목이자 윤리적 기준이 되어 버리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경험하고 또 목격해 왔다. 시장이 윤리가 된 지금,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 시장의 자유, 인적자본. 사회를 해체하지만 가족을 유지하는 것.
’가족‘은 이미 오랫동안 그리고 고전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생 및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분석되어 왔다.
“현대의 권력작용은 ’억압이냐 이데올로기냐‘라는 고전적인 양자택일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언어, 지각, 욕망, 운동 등을 대상으로 하여 미시-배치를 통과하는 표준화, 변조, 모델링, 정보화라는 절차를 내포하고 있다.”
’되기‘를 통해 달성되는 다양체적 집단의 구성 이 가능성에 대해 검토.
3장 믿음과 제도
다수와 소수는 두 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사용. 상수 또는 표준을 이성애자-유럽인-표준어 사용자-도시 거주자-성인-남성-백인이라 상정해 보자. 성인 남자 인간은 모기, 아이, 여자, 흑인, 농부, 동성애자 등보다 수적으로 적더라도 다수임이 분명하다. 표준 인격이라는 다수적 사실에 대립하여, 소수적으로 되기는 자율이라 불린다.(천 개의 고원)
다수화를 탈영토화하는 언어적 실천은 표준 인격으로부터의 탈주이며, 이는 창조와 자율이라는 정치적 실천과 공명한다.
바디우는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은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저항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미증유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선을 긋는다.
부조리한 사회, 억압이 되어 버린 제도, 권위적인 체제 등은 이미 그 자체로 폭력이다. 슬픔 정념에 빠진 약할 대로 약해진 자들이 어느 순간 연대하여 반항하고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숭고한 마음이 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의 탄생이 바로 ’민중‘의 탄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순간‘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스스로를 선이라 참칭하고 그 외의 것을 악이라 하는 그때부터 그들은 그 자체로 법정립적인 신화적 폭력이 될 것이다. 폭력에 항거하면서 시작된 세력이라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비폭력의 진영에, 즉 선의 진영에 분류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선악에 진영은 없다. 자리나 위치도.
4장. 세계와 민중
문화인류학자 아파두라이는 현대사회를 “터키 출신의 임시 노동자들이 독일의 싸구려 아파트에서 터키 영화를 보고, 필라델피아의 한국인들이 위성방송을 통해 88올림픽을 시청하며, 시카고의 파키스탄인 택시 운전사들이 파키스탄이나 이란의 이슬람교 사원에서 녹음된 찬송가 테이프를 듣는 현재의 세계에서, 우리는 재빨리 옮겨 다니는 이미지들과 탈영토화된 관객을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이론들이 무력화될 것이며, 시간성으로서의 공간이라는 공간 개념의 전격적인 탈바꿈. 들뢰즈는 엥겔스를 빌려 “국가 기구만이 유일하게 영토적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국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나누기 때문이다.” 유목적 공간은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에 의해 공간이 할당된다. 이것이 공간을 사유하는 현대적 방식이다. 도시라는 것이 결코 고전적인 의미의 용기(그릇)로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전적인 공간 이해에 대한 현대적인 공간 이해는 고정된 용기가 아닌 ’관계‘로 지탱되는 위상학적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
고정된 점으로서의 공간이 아닌 관계로서의 공간이라는 들뢰즈의 새로운 공간론은 정치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돈에 물들지 않은 공간, 사람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이념에 의해 숨 막히게 하지 않는 공간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우리‘가 있다는 믿음. 정치라는 것은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지금-여기를 지옥같이 느끼더라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디에도 없는 공간, 즉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도시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전 지구적 불평등이라는 비극이다. 국가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만 시장에 개입한다. 자본국가의 이러한 운동들은 모든 욕망적 과정을 자본으로 환원하는 편집증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동일시되는 것들만의 울타리, 안전, 애국, 호국 그리고 자기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척, 공포, 악마적인 공간에 배치 등의 움직임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새로운 공간이 생산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투쟁은 도주의 한 양태일 수 있다. 도주하는 운동에서 투쟁이 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투쟁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국가를 경유하지 않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 매끈한 공간, 자본과 국가의 홈 파기를 벗어나는 욕망의 탈영토화하는 힘. 데이비스가 본 유목민 현상, 누더기를 걸친 자본가들의 현상은 자본국가의 논리의 이면이지, 자본국가를 진정으로 벗어나는 과정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과정의 결과 나타나는 재영토화 현상인 것이다. 상호부조라는 가치 창조의 과정. 가치 창조는 곧바로 공간의 창조이다. 순수공간, 도시는 이러한 공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유토피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저항적 움직임을 탄생시킬 가능성. 슬럼, 빈곤, 착취로 얼룩진 도시 생태는 이러한 유목민들에 의해 새로운 시공간을, 다시 말해서 자본으로 환원된 세계 위에 우리가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다는 것, 혹은 그러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 그것부터가 바로 들뢰즈가 생각하는 정치의 시작이며, 이 믿음으로부터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자들, 그들이 민중이자 유목민이다.
에필로그
혁명. 가치의 창조와 가치의 전환으로서의 혁명. 새로운 정치적 영역. 비르노와 코소는 비대의적 민주주의. 혁명은 도주이다. 허용된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시공간의 창조로서의 전쟁기계. 국가는 각 제도들을 통합, 반복, 홈 패는 작동(다수적 운동)이고, 민중은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 제도를 발명하는 소수적 운동이다. 도주하는 방법은 사유다. 유목민이란 가장 위대한 신무기 개발자들이며, 도주란 실재를 생산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무기를 발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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