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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들뢰즈의 정치-사회 철학/신지영. 그린비

나무와 들풀 2024. 9. 17. 16:41

통제 사회에 던지는 질문

들뢰즈의 질문. “경제적 양극화는 왜 정치적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왜 같은 비율의 정치적 양극화, 곧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정치적인 진영의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68쪽)

들뢰즈의 질문이지만, 우리도 선거 때마다 이런 의문을 품는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 비씨 카드를 선전하며 당시 유명 배우가 나와서 “부자 되세요.”라고 하던 광고를 잊지 못한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던, 최소한의 염치가 있어서 내가 속물인 건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표현하지 않았던 금기를 공공의 전파를 타고 모든 가정에 살포한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나는 이 사건부터 우리 사회는 기업가의 영혼이 모두를 대놓고 잠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기업가의 영혼은 이른바 ‘경쟁’과 ‘성과급’이다. 이것은 가스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개인의 영혼을 잠식했다. 가스와 같이 나에게 스며들어와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전모를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이미 경쟁과 성과급을 욕망하는 기업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윤석열 씨가 대선에 나와 “경쟁에서 이긴 자가 성과를 받는 것이 공정한 사회다.”라고 외치며 젊은층의 지지를 받고 당선했을 때 이미 우리 모두의 영혼은 기업가의 영혼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반대하는 정책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했다.

푸코가 18세기와 19세기를 규율과 감시 사회라고 보았으나, 2차 세계대전 후 규율과 감시는 천천히 자리잡기 시작하던 새로운 힘에 의해 위기에 처한다.(8쪽) 지금 우리는 공장의 시대를 지나 물류센터의 시대, 플랫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무수히 연결된 인터넷과 SNS, 무한한 개인 채널들이 있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정보의 공개와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황만 보면 이론적으로 가능한 한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되려 자기가 자기의 정보를 무한히 노출하며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한다. 이것이 새로운 힘인 통제사회다. 이 통제 사회의 핵심이 바로 ‘경쟁’과 ‘성과급’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주장에 낯설어하고 동의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업가의 영혼에 잠식당한 사회를 선택했고 여전히 그것을 요구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나이든 세대가 통제사회를 고민하고 고통스럽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고민한 것처럼 이 체제의 목적과 빠져나오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 역시 그들의 몫(31쪽)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들뢰즈는 우리 사회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모순과 적대가 아니라 흐름과 도주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인은 사회의 생산과 분리된 생산 주체가 아니라 개인의 망상이 사회의 망상에 겹쳐서 생산한다고 통찰한다.(77쪽)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시장경제에 맞는 경쟁을 위한 공간 확립으로 정의하고, 정부의 역할을 경쟁이 활성화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 개인은 여기서 하나의 자원으로 인적자본이 된다고 하였다. 이른바 인간기계다. 그리하여 기계처럼 수명을 늘리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관리하며 ‘자기 자신’이라는 자본을 가장 높은 가격에 가능한 한 가장 오래 파는 ‘기업가’의 위치에 서게 된다.(139쪽)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노동자나 사용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구성 부품이 되기 때문에 기계의 재발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역시 이미 인간에게 봉사하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으며, 말 그대로 빅테이터는 인간의 소비, 행동, 생각에 스며들면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 존재가 되었다. 푸코가 개인을 인적자본으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유지하여 가능한 한 오래 가장 높은 값으로 스스로를 시장에 파는 기업가라고 바라보는 것처럼, 들뢰즈는 우리 모두를 보편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라고 본다. 마르크스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아니라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누더기를 걸친 자본가’들인 것이다.(142쪽)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 자본가의 의식으로 살아간다.

젊은이들이 왜 영끌로 아파트에 ‘투자’하고, 코인‘투자’에 열광하는지 이해하는데 푸코와 들뢰즈 선생님의 통찰을 빌린다면 충분히 설명된다. 자신의 능력을 자유로이 사고판다는 환상 속에서, 즉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개인은 자유주의를 무한히 지지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 개인들은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통계적 인간, 평균적 인간, 기준으로서의 인간으로 수렴해 간다. 이렇게 수렴된 인간이 ‘인구’이다. 인구를 이루는 “적어도 하나의 불변항”은 바로 ‘욕망’이다. 인구와 욕망은 푸코에게서 한 쌍이 된다. 이미 자본에 포획된 존재로서 인구. 욕망은 이윤의 갈망으로서의 욕망. 들뢰즈는 이런 인구들이 우리 시대의 개인으로, 이제 저항할 대상도 없고 저항할 원리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151쪽)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윤리로 만들겠다는 이데올로기다. 이것은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가리지 않고, 경쟁이 최고의 덕목이자 윤리적 기준이 되어 버리는 사고방식을 갖게 한다. 시장이 윤리가 된 지금,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 시장의 자유, 인적자본을 끊임없이 축척하는 것, 사회 해체.

“현대의 권력작용은 ‘억압이냐 이데올로기냐’라는 고전적인 양자택일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언어, 지각, 욕망, 운동 등을 대상으로 하여 미시-배치를 통과하는 표준화, 변조, 모델링, 정보화라는 절차를 내포하고 있다.”(174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가? 표준화, 모델링화, 정보화망에 걸리지 않는 수많은 ‘되기’를 통해 달성되는 다양체적 집단(소수 집단)의 구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수와 소수는 두 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사용이다. 상수 또는 표준을 이성애자-유럽인-표준어 사용자-도시 거주자-성인-남성-백인이라 상정해 보자. 성인 남자 인간은 모기, 아이, 여자, 흑인, 농부, 동성애자 등보다 수적으로 적더라도 다수임이 분명하다. 표준 인격이라는 다수적 사실에 대립하여, 소수적으로 되기는 자율이라 불린다.(‘천 개의 고원’, 들뢰즈 저)

다수화를 탈영토화하는 언어적 실천은 표준 인격으로부터의 탈주이며, 이는 창조와 자율이라는 정치적 실천과 공명한다. 여기서 탈주는 사전에 등재된 의미가 아니다. 소수적으로 되려는 자율을 의미한다. 바디우는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인간은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인간이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저항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미증유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동물과 선을 그었다.(234쪽)

부조리한 사회, 억압이 되어 버린 제도, 권위적인 체제 등은 이미 그 자체로 폭력이다. 슬픔 정념에 빠진, 약할 대로 약해진 자들이 어느 순간 연대하여 반항하고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숭고한 마음이 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의 탄생이 바로 ‘민중’의 탄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순간‘이다. 우리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촛불로 탄생된 민중들을.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스스로를 선이라 참칭하고 그 외의 것을 악이라 하는 그때부터 그들은 그 자체로 법정립적인 신화적 폭력이 될 것이다. 폭력에 항거하면서 시작된 세력이라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비폭력의 진영에, 즉 선의 진영에 분류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선악에 진영은 없다. 자리나 위치도 없다.(243쪽)

촛불을 지속적으로 태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공간, 사람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이념에 의해 숨 막히게 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우리(민중)‘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정치라는 것은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가능하다.(281쪽) 우리는 심지어 지금-여기를 지옥같이 느끼더라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디에도 없는 공간, 즉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283쪽)

도시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전 지구적 불평등이라는 비극이다. 국가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만 시장에 개입한다. 자본국가의 이러한 운동들은 모든 욕망적 과정을 자본으로 환원하는 편집증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동일시되는 것들만의 울타리, 안전, 애국, 호국 그리고 자기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척, 공포, 악마적인 공간 배치 등의 움직임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293쪽)

자본국가의 악마적 공간 배치에서 탈영토화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투쟁은 탈주의 한 양태일 수 있다. 탈주하는 운동에서 투쟁이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투쟁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국가를 경유하지 않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 자본과 국가의 체제를 벗어나는 욕망의 탈영토화하는 힘. 민중의 자율적인 탈주로 인한 소수 되기. 자본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과정. 상호부조라는 가치 창조의 과정. 도시가 이러한 공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

슬럼, 빈곤, 착취로 얼룩진 도시 생태가 탈주하는 민중들에 의해 새로운 시공간을, 다시 말해서 자본으로 환원된 세계 위에 우리가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다는 것, 혹은 그러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 그것부터가 바로 들뢰즈가 생각하는 정치의 시작이며, 이 믿음으로부터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자들, 그들이 민중이다.(3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