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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피투자자의 시간/ 미셸 페어 저, 조민서 역 본문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에서 만국의 노동자에게 변화된 시대에 맞게 변모한 모습으로 연대하여 투쟁하라고 주장한다. 하비의 말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했지만 노동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제시하지 않아 누구나 하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에 끝이 허망했다.
그에 비해 『피투자자의 시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시기적으로 분석하고 현재까지 진행된 특징을 포착하여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그의 대안을 일반화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만 행동해야 할 바를 핀셋으로 콕 집어주는 느낌을 준다.
책은 총 여섯 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들어가는 부분과 결론, 저자와 한 인터뷰를 빼면 본문은 세 장으로 구성되었다. 부록으로 경제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역자가 저자와 책과 관련해서 인터뷰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으로 마지막에 있다.
1장에서는 기업 거버넌스의 이해관계가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한다.
2장은 그에 따른 정부 정책 변화를 말하는데 주권을 가졌다고 믿는 시민이 어떻게 금융 자본주의 앞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없는지, 정부와 시민 모두 신용도 앞에서 약자가 되었는지 자본주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주권자로서 시민의 힘을 잃고 투자자의 상대편에 있는 피투자자로서 힘없는 개인으로 변모하는 모습이 서술된다. 그리고 그런 개인을 상대하는 정부의 태도 변화를 설명한다.
3장은 산업 자본주의에서 금융 자본주의로 축이 옮겨가며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가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키게 되는 결과를 서술한다. 각국에서 주로 불안정한 일자리가 공급되고 사회 복지 혜택은 줄어들며 노동 조직은 약화하는 암울한 상황에 내몰리고 원자화된 임금노동에 던져진 사람들, 이 사람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플랫폼 자본주의’로 흡수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저자는 ‘좌파의 우울’을 벗어날 틈새를 제안한다. 과거 자본주의 시대에 했던 노동조합의 투쟁은 이제 통하지 않기에 노동자에서 프레카리아트로 바뀐 피투자자로서 대안 운동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참고하라고 한다. 다만 이 사례들은 성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커다란 구멍도 작은 틈에서 시작되니까.
금융 자본주의 시대 운동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투자자들이 투자 방침을 재평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바른 방향을 선택해서 걷고 있는 기업과 국가에 투자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과거 자본주의 시대의 갈등은 노동 시장에서 전개되었다면 지금은 주가가 결정되는 시장으로 장소가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에 좌, 우로 축을 가르고 투쟁했다면 지금은 ‘약자들’과 ‘권력자들(1퍼센트)’로 분할한 구도에서 ‘약자들’이 연대하여 투자 신용도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정부가 하는 통치의 핵심은 피투자자들이 대출 기한을 갱신하려면 채무를 상환할 수 있게 평판을 관리하고, 채권자들이 파산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대출자에게 강조하는 일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채무자들이 과거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모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채무자’가 자신들의 공통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집합적인 의식으로 연대하여 신용 공급자에게 종속당하게 만드는 규범들을 폭로하고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채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것만으로도 채권 시장에 신세를 지고 있는 공직자 및 금융 기관에 무시무시한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이렇게 되려면 채무자의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어이가 없는 것인지를 폭로해야 한다.
미셸 페어는 금융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지금이 금융에 대항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정치를 전개해 나가는 주인공을 ‘피투자자’로 명명했다. 피투자자가 갖는 주체성에 따라 새로운 통치성이 작용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예속될 수 있으니, 그 틈새에서 저항을 발견할 수 있다. 좌파 정치의 전략 역시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한다. 은행을 벤치마킹하여 시민으로서 자신에 대한 책무를 다하라고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사회적 채권자’라는 지위를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본주의 황금기를 지나 금융 기관이 지배적인 세력으로 등극하면서 새로운 우선 순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자사 주식의 등급 평가에 목을 매고, 공직자는 채권 소유자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가계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의 노동 운동이 주로 노동자가 창출하고 자본 소유자가 전유하는 잉여 가치의 재분배를 놓고 투쟁했다면 오늘날의 투쟁은 신용 할당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신용은 정의상 타인에 의해서만 가치가 매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용의 가치를 어떤 가치로 선점하고 그 흐름을 바꾸느냐이다. 여기에 착안한다면 피투자자들에게 적합한 슬로건은 아마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일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한 개인이 우버와 같은 약탈적 플랫폼에 들어가지 말고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행동하라고 한다. 또 다른 투기의 한 방향으로 저자가 제안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책들의 결론은 같다. 이젠 알았으니 행동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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