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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유호식 역, 문학동네

나무와 들풀 2020. 4. 30. 08:24

페스트

 

카뮈 쓰고 유호식 옮김. 문학동네

박현숙 발췌

 

이 연대기에서 다루고 있는 이상한 사건들은 194*년 오랑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고 있듯이 이 사건은 다소 이례적이라서 오랑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다. 사실 언뜻 보아도 오랑은 평범한 도시로 알제리 해안에 있는 프랑스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4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료실에서 나오다가 층계참 한가운데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도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페스트나 전쟁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의사 리외도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대책이 없었다.

전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은 무능했고,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타루는 그다음날부터 일에 착수해 보건대를 조직했고 잇따라 다른 보건대가 여러 개 조직될 예정이었다.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기 전 꼭 기록해둬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랑베르처럼 마지막으로 남은 개인들이 행복을 되찾기 위해, 또 페스트로 인해 자신의 몫이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오랫동안 단조롭고 절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랑베르는 페스트 이전엔 범죄자였으나 페스트로 공권력이 무너지면서 자유를 얻었고, 이 틈을 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얻었으며 그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이다. 마지막 페스트가 끝나자 저항하며 총을 쏘다가 경찰에게 연행된다.)

질병은 얼핏 보면 포위된 자로서 느끼는 연대의식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군집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저마다 고독에 잠기게 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초래되었다.

인간의 죽음은 항상 관리가 가능했다. (죽은 자의 수를 세어 통계를 내고, 통계가 끝나면 시체를 매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실업자들로 간부직을 충원할 수는 없지만, 막노동의 경우에는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 그 시기부터 사람들은 궁핍함이 실제로는 공포보다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늘 확인할 수 있었고, 위험 정도에 따라 보수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더욱 두드러졌다.

재앙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차츰 탈진 상태에 빠져들었는데, 탈진 상태가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에 대한 무심함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두는 어떤 태만함이었다. 위생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몸에 실시해야 하는 수많은 소독규칙 중 몇 가지는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 예방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페렴형 페스트 환자 곁으로 달려가는 일도 있었다. 페스트와 투쟁하는 것이 사람들을 페스트에 취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시민들에게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일련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어법으로 예고하는 예언이었는데, 그것들 각각을 지금 시민들이 겪고 있는 사건으로 볼 수도 있었고, 또 그 사건들이 어찌나 복잡한지 다른 해석도 모두 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같이 노스트라다무스와 성녀 오딜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그런 예언들은 마지막에 가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페스트만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 보급 문제가 악화됨에 따라 또다른 걱정거리들이 생겨났다. 거기에 투기까지 끼어들어, 부족한 생홀필수품들이 일반 시장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 결과, 가난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상황에 놓인 반면 부유한 가정은 부족한 것이 거의 없었다.

2월의 어느 화창한 날 새벽, 마침내 시의 출입문들이 개방되었다. 시민들과 신문, 라디오는 물론이고 도청에서도 공식 성명을 발표해 그날을 축하했다.

도시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을 실제로 들으며,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기쁨에 젖어 있는 군중은 모르고 있지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들을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페스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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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