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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왕의 세수대야> 2020년 3월 칼럼

나무와 들풀 2020. 8. 25. 12:32

탕왕의 세수대야

 

교사 박현숙

 

3년 동안 학교를 휴직하고 시흥시청에서 시흥혁신교육사업을 하다가 올해 학교로 복직한다. 3년 만에 학교에 들어가려니 설렘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다.

아이들은 얼마나 변했을까?’, ‘학교는 또 얼마나 변했을까?’, ‘나는 어떻게 아이들을 만나야 하나?’ 이런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런 설렘도 잠시, 발령받은 학교의 ‘2020학년도 교육과정 운영 안내책자를 받아 보고 가슴이 턱 막혔다.

 

수업 시작 : 학생 모두 기립 책상 열 맞추고 차렷, 공수, 배례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사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수업 끝 : 학생 모두 기립 책상 열 맞추고 차렷, 공수, 배례 감사합니다.” 교사 사랑합니다.”‘ (굵은 글씨체는 그 책자에 표시된 대로임)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3년에 근무했던 학교보다 더 뒤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분명 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이 논리대로라면 학교도 변했으나 세상의 변화나 아이들의 변화에 비하면 한참 느리게 변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학교와 학생 두 대상이 변하는 격차 속에서 나는 학교로 복직이 갈등의 시작일 것 같다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다.

번스타인이란 학자는 기본적으로 학교를 통해 사회의 지배 방식이 후대에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 방식은 특정한 코드(사회의 이념이 반영되는 특정한 방식이나 유형)를 매개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분리통제라고 보았다.

분리는 기준에 따라 나누고 등급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등급화하는 것, 모범생, 문제아 등으로 분리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회에서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기준을 정하면 그 기준에 따라 구성원이 서열별로 분리가 일어나므로, 서열이 앞설수록 권력과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강한 사회일수록 분리도 강하게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강한 분리에서 약한 분리로 이행하는 과정일 것이다.

통제는 일정한 틀에 따라 사회구조가 통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면 일어나서 책상 줄을 맞추고 선생님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교사들은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 이것이 통제의 한 예이다. 통제의 코드가 약한 학교라면 이런 식의 인사를 교육과정 안내 책자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통제의 코드가 약한 학교라면 교사와 학생의 인사는 매일매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 어제 블랙독 보셨어요?“ ”“ ”어땠어요?“라든가, ”영미야, 오늘 얼굴이 핼쑥한데 아프니?“라든가, ”펭하~“라든가 하는 다양한 인사가 교실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겠다. 역시 민주주의의 발전은 강한 통제에서 약한 통제로 이해되는 과정일 것이다.

 

교육에 대해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민주사회, 민주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리가 약화되면 배제된 것들이 귀하게 살아난다. 기준이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밝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맞게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민주사회가 아닌가?

들뢰즈는 일상의 반복을 차이라고 보았다. 매일매일 똑같이 밥 먹고, 학교 가고, 잠 자고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차이, 예를 들면, 학교 가는 길에서 본 우리 동네 할머니 얼굴, 잠을 자기 전에 갑자기 생각난 것, 밥을 먹으면서 본 엄마의 얼굴 표정 등이 하루하루 다르게(차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생성). 하루하루가 매일 똑 같이 반복된다면 어떤 새로운 것이 생겨날까?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은 차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창조된다.

분리와 통제를 넘어설 때, 차이가 귀하게 다가오고, 소통이 원활하게 된다. 하물며 수백 년 전 은나라 탕왕도 세수대야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 써놓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의 차이를 발전이라고 생각했다는데.......

 

* 블로그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이후를 덧붙여야 오해가 없을 것 같아 붙인다. 지금 복직한 학교는 위의 교육과정 안내책자처럼 그렇게 인사하지 않았다. 교육과정 책자에만 있는 것이었다. 또한 복직한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디게 변하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