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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무와 들풀 2024. 10. 28. 14:32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말과 생각을 하는 힘의 중요성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통해 자세히 알려주는 보고서다. 이와 함께 나치스가 유대인은 물론 인류에 저지른 악행도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에 의하면 아렌트는 이 보고서를 쓰고 시온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인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가 인간성을 포기한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며, 누구라도 조건만 갖춰진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는 당시 가장 크고 비참한 피해를 입은 유대인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민족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유대인인 아렌트가 그토록 냉철하게 재판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었으니 같은 민족으로 어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돈 많고 권력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재해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렌트는 보고서에서 나치스가 유대인에게 행한 범죄의 ‘일반적인 그림’에서 빠진 가장 심각한 부분은 나치 지도자와 유대인 당국 사이의 협력을 증언해줄 증인임을 지적했다. “왜 당신은 결국 자기 자신의 파괴로 이어지는 당신 민족의 파괴에 협력했나요?”라는 질문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진실은 현지 및 국제적 수준에서 유대인 공동체 조직들과 유대인 정당, 그리고 복지 조직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든지 간에 유대인에게는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리더십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나치스와 협력했다.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 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7쪽)

이런 불편한 진실을 보고서가 예리하게 지적할 때 유대인 절멸 정책 속에서 살아남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국제법이 아닌 유대인 법으로 독일의 아이히만을 단죄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결코 편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 보고서 이후 후원자가 끊기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과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죽는 순간까지 현실을 망각한 나치스의 언어규칙에 길들여진 틀에 박힌 말을 구사하였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치스가 만든 언어규칙에 단단히 둘러싸인 사람이었다.

나치스는 언어를 암호처럼 사용하여 사람들이 현실 인식에 무감각하게 하도록 마비시켰다. 히틀러나 괴벨스가 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게 했던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라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사람들을 자기기만에 빠지게 했다. 전쟁이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하고,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며, 전쟁은 독일인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했다. (110쪽)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때 그가 살았던 세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행위’할 능력, 더 잘 말하자면 도덕적인 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광대였다.

나치스가 하는 행위들을 기만하고 은폐하기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 가운데 히틀러가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 최고의 것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가 결국 아무 이유 없는 죽음이라고 볼 때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아이러니가 아니냐고 경찰 심문관이 물었을 때도 아이히만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하고, 말의 힘은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아렌트 입장에서 볼 때 아이히만은 구제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곤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근면성 자체를 판단한다면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근면하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를 심문한 경찰인 독일계 유대인과 마주 앉아 진심을 다해 자기가 친위대의 중령 지위밖에 오르지 못했고, 자기가 진급하지 못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설명하면서 4개월 동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상상력의 결여 때문이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수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었다.(392쪽)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자신이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복종에서 나왔으나, 복종은 일반적으로 덕목으로 찬양된다. 다만 그의 덕목이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사형이 집행될 때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성서를 읽어주겠다는 도움을 거절했고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면서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형집행장에서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349쪽) (너무나 중요한 문장이라 그대로 옮겼는데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서평을 마치며 정화열 교수의 경고를 옮긴다.

퀸시 라이트는 전쟁에 대한 기념비적 저술에서 인류의 문명 즉 인류의 야만의 연대기에서 매 2년마다 한 차례씩 중요한 전쟁이 있었음을 오래전에 발견했다. 우리는 전쟁에 마취되어버렸거나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평범하게 되어버렸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