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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원고 (112)
나무
교사의 4대 명절 중 하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시험 기간이다. 시험 전 혹독한 나날을 지내고 무사히 시험 기간을 넘기고 있기에 지나가는 게 아까운 날들이다.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섣부르게 이런 소리 해서 동티가 나려나? 5일 시험 기간 중 3일째인데 아직까지는 출결에서 서류 필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시험 이틀 전엔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있었다. 이런 날은 우리 학교에 3년 있으면서 지켜본 바로는 3학년 학생들이 많이 결석한다. 현재 보고 있는 지필고사도 오늘 3학년 감독하러 들어갔더니 10명 이상 학생들이 미인정 결석과 인정 결석, 질병 결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3학년 이야기였다. 오해할 수 있어 해명하자면 3학년은 이래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그런 현상이 있고, 그것을 걱정하고 해결하..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말과 생각을 하는 힘의 중요성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통해 자세히 알려주는 보고서다. 이와 함께 나치스가 유대인은 물론 인류에 저지른 악행도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다.『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에 의하면 아렌트는 이 보고서를 쓰고 시온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인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가 인간성을 포기한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며, 누구라도 조건만 갖춰진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는 당시 가장 크고 비참한 피해를 입은 유대인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민족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유대인인 아렌트가 그토록 냉철하게 재판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었으니 같은..
지필고사 출제 기간이라 시험에 관련된 사항들을 안내하는 평가 담당 교사의 메시지를 거의 매일 한 통 이상은 받고 있다. 그런데 어제는 지필 교사 관련이 아닌 고등학교 성취평가제 모니터링 체제 시범운영에 대한 교육청 공문을 안내받았다. 성취평가제 운영을 내실 있게 하고, 학생 개인별 성취 수준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 모니터링 체제를 시범 운영한다는 것이었다.이 메시지 이전에도 같은 담당자가 최소 성취기준 미도달 예방지도 및 보장지도 2학기 계획서를 내고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그래서 교사들은 계획서를 만들고, 수행평가 계획을 확인하고, 지필고사 난이도를 고민하며 1학기 때 최소 성취 수준 미도달이었던 학생들을 만날 땐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 종종 확인도 하고 있다.그런데 며칠 전엔 기초학력을 ..
얼마 전에 수업 공개 협의회가 있었다. 학교 일 중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나, 내 동료 교사는 그날 조퇴를 쓰겠다고 했을 만큼 스트레스 주는 일이었다.2년 전 우리 학교에 왔을 때 수업 공개가 몹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았고, 일반계 고등학교의 보편적인 분위기인가 보다 생각하며 묻어갔다. 수업하며 궁금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부분은 다행히 혁신학교에 근무하다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온 수학 선생님이 같은 학년 담임이라 그분과 서로 수업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함께 나누고 고민했다. 우리 학교의 지극히 형식적인 수업 공개와 협의회를 하며 이전 학교의 수업 공개와 연구회가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학교가 그런 감정을 길게 끌며 간직할 만큼 여유 있는 곳은 아니다.그러다 교장 선생님이 바뀌면서 올..
파커 J.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으로 교사들에게 친숙한 저자다.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같은 내용을 접해도 받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아마도 내가 하는 일에 버거움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짐을 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과도하게 얹었던 짐을 부리며 삶에 겸손해질 수 있었다. 지금 과도한 책임감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에서 작을지라도 위로가 되는 말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내 인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1장에서 저자는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라고 충고한다.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
얼마 전 '글로컬미래교육박람회'에서 초등학교 4학년 수학 수업을 시연한 동영상과 AI 디지털 교과서 홍보 영상을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봤다. 많은 사람이 반대를 심하게 해도 교육부가 부득부득 실행하는 디지털 교과서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수업 시연 영상을 운 좋게 본 것이다. 혼자 조용히 봐도 될 일이지만 굳이 초등학교 샘들과 함께 본 것은 뭐랄까 이런 핫한(?) 걸 혼자 볼 수는 없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보고 난 후 수업을 함께 이야기할 사람들도 필요했다. 영화 같은 경우도 그것이 좋든 나쁘든 혼자 보고 끝내는 것과 여럿이 같이 보고 느낌을 나누는 것은 본 것에 부여하는 의미의 층위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이 보고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먼저 디지털 교과서가 어떤 것인지 명확히 ..
통제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뢰즈의 질문. “경제적 양극화는 왜 정치적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왜 같은 비율의 정치적 양극화, 곧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정치적인 진영의 양극화로 귀결되지 않는가?”(68쪽)들뢰즈의 질문이지만, 우리도 선거 때마다 이런 의문을 품는다.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 비씨 카드를 선전하며 당시 유명 배우가 나와서 “부자 되세요.”라고 하던 광고를 잊지 못한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던, 최소한의 염치가 있어서 내가 속물인 건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표현하지 않았던 금기를 공공의 전파를 타고 모든 가정에 살포한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한테는.나는 이 사건부터 우리 사회는 기업가의 영혼이 모두를 대..
2025년 사용할 교과서 선정을 하느라 교과협의회, 교과서 선정위원회 등등을 하며 여러모로 분주하다. 학교에서는 직원회의 시간에 교과용도서 선정 부조리 예방 안내자료를 배포하고, 교육과정 부장이 나와서 설명하면서 교과서를 선정하며 잡음이 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라고 한다.그러는 도중 학교에서 ‘급별과 상관없이 교과서에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출판사 도서는 제외’하고 선정을 하라고 한다. “아니!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상관없는 교과서의 출판에 관계했더라도 그 출판사 교과서를 제외하고 선정을 하라고? 이게 더 문제 있는 선정 아닌가?” 했으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던 교사들이 교과서를 선정할 땐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학생들한테 적합한 것인가를 따져 고르는 것을 알기에 벌컥하고 치받..
10여 년 전 혁신중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 개를 키우자고 말씀드렸다. 학교에 개가 있고, 학생들이 그 개마저도 함께 살아갈 생명으로 인식하면, 이 또한 중요한 교육이라며 개를 동네에서 데려오겠다고 했다.그러자 교장 선생님은“아이고, 개털 날리고, 똥 싸면 누가 치우고, 밥은 누가 주며, 방학 때는 어쩌라구요” 라며 손을 내 저으셨다.“제가 애들하고 할게요. 방학 때도 알아서 할게요.” 라고 했지만,교장 선생님은“택도 없는 소리! 결국 내 일로 돌아올 거야.” 하셨다.그런데 더 조르려고 했던 내 마음을 중단시킨 건 영양 선생님과 시설 주무관님이었다. 내가 “개를 키우고 싶다.”고 하며 여기저기 떠들고 다녀서인지 이 두 분이 교장실로 헐레벌떡 들어가셔서“개는 절대 안 됩니다. 장독대에..
옆집에서 20Kg 정도 되는 쌀자루를 우리 집 문 앞에 놓고 갔다. 쌀자루에는 "저희 아이들 항상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쪽지 인사말도 붙어 있었다. 순간 김영란법이 생각났다. 그러나 김영란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옆집은 자녀가 세 명이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두 자녀와 초등학생. 5년 정도 나란히 현관을 두고 살았으니 그 집 자녀들이 유, 초, 중학생 시절부터 내가 봐왔던 셈이다.가장 큰 자녀는 남성인데, 자전거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사용하지 않는 자전거 용품, 튜브, 바퀴, 가민 거치대, CO2 카트리지, 인젝터 펌프 등등을 줬다. 그런 것들을 받는 옆집 남학생이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지을 때 나는 내 용품들을 당근에 올리지 않고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했다.자전거의 바퀴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