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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원고 (112)
나무
늘 학교에 오면 아침 7시 30분에서 40분 사이다. 이렇게 일찍 나와서 일을 시작해도 매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퇴근하게 된다. 나는 비교적 일을 빠르게 잘 처리하는 사람인데도 이러니, 주어지는 일의 양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학교만 그런 것일까? 우리 사회가 모두의 임금을 짜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학교가 마음 편하고 즐거운 곳이라고 느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요즘은 수행평가 때문에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 같지 않다. 1학기 수행평가의 내용을 적어본다.프로젝트 1. 지역의 언론을 찾아 정책 논제를 정하고 그것으로 찬/반 입장을 나눠 내용 마련한 후 입론 발표하기(10점), 입론한 자신의 견해를 주장으로 만들어 주장하는 글쓰기(15점)프로젝..
두 주 전 화요일에 우리 반 여주가 자퇴했다. 중국에서 작년에 왔는데 의사소통이 너무 어려워 자퇴하고 집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학업 숙려제가 있고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고 상담 교사가 어머니에게 권했는데,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면서 바로 자퇴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일이 진행되었다. 엄마는 상담실을 나가며 눈물을 보였다.여주는 쌍둥이인데, 옆 반에 쌍둥이 동생이 있어 학교에서 늘 붙어 다녔다. 둘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어려움을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친구들과 청소 역할을 나눌 때도 무엇을 물어보면 배시시 웃기만 했고,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알았어, 우리가 바닥을 닦을 테니 너는 쓸어.” 하면서 쉬운 일을 여주에게 줬다.입학하고 두 달..
3월 화이트 데이에 손편지와 예쁜 사탕꽃다발을 나와 학급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민지가 많이 아프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으면 나을 수 있겠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약을 먹기도 쉽지 않고 먹어도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민지는 4월 수련회에 갔다 와서 다음 날부터 아프다고 조퇴를 계속했다. 워낙 발랄하던 학생이라 진짜 아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련회에서 생긴 문제로 말미암은 마음의 병이었다. 수련회 때 밤에 친구들과 좋아하는 남학생을 비밀로 하기로 하고 서로 밝혔는데, 학교에 와 보니 남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느낌을 받았고 배신감으로 친구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친구들은 잘못하지 않았다며 사과를 거부했고, 그 이후로 민지는 학교에서 조퇴를 거듭하면서 전학을 말했으며,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겨우..
4월 초의 일이다. 교직원 조회 때 직장 내 성희롱이나 갑질 관련 신고 안내를 하던 교사가 다소 긴 글을 읽겠다며 3, 4분만 들어달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듣고 있는데, 뭔가 내용이 이상했다.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소개하며 읽는데, 1인칭이 뒤섞이고 어느 학교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재작년 내가 우리 학교에 처음 왔을 때 일이 연결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사는 낭독을 하다가 어떤 순간엔 전체 교사들을 쳐다보며 자기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하는 듯한 말도 했다. 낭독은 끝났고, 교사는 긴 시간 자신의 글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어색했던 교직원 조회는 끝이 나고 우리는 삼삼오오 흩어져서 각자의 사..
교실에 들어가면 유독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처음 본 학생들 중에 신체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학생들 뿐 아니라 신체가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음, 운동을 하는군.’‘무슨 운동인지 모르지만 동호인 수준은 아니군.’‘발레를 하나?’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20년 넘게 즐기는 운동이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운동으로 달라진 사람의 신체가 눈으로 먼저 들어온다.우리 반에도 처음 들어갔을 때 눈에 띄는 신체가 있었다. 그를 보면서 체육 계열로 진학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수업 시간에 아주 열심히 참여해서 ‘참 될성부른 나무일세.’라고 흐뭇하기도 했지만, 너무 과하게 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과도한 참여에 비하면 활동 결과가 많이 빗나가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고..
'거만한 바보'로 살지 않으려면 누군가와 대화할 때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기껏 길게 시간을 들여 설명을 했는데, 하나도 안 들은 것처럼 처음 주장을 되풀이할 때 ‘차라리 우리 집 강아지하고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재작년 1년을 같이 생활했던 동 학년 동 교과 파트너와 지냈던 악몽이 떠오른다. 그 교사에게 교과 성취기준을 말하면 교과서 출판사 문제은행에서 내려 받은 문제를 보이며 ‘안전한 문제’니 ‘문제없다’고 했고, 그게 문제라고 ‘성취기준’으로 평가문항을 제작해야한다고 말하면 나에게 ‘융통성이 없다’고 했다. 당시 ‘성취기준’으로 수업과 평가 문제를 말하는 내 자신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고, 번번이 소통에 실패하고 싸움으..
3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한 학기를 보낸 느낌이다. 심지어 다음 주 월요일엔 수련회도 간다. 수련회 갔다 오면 아마도 곧 방학을 맞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것만 같다. 수련회에 우리 반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못 가는 학생이 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15만 원 정도 보조금이 지원되는 걸 알려드렸는데도 어렵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시청 교육 협력 부서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는 방도가 없다고 했다. 시장님께 건의해서 체험 학습 지원도 내년에는 교육 지원 사업에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예산 상 어려움이 있다면 교복 지원 사업을 폐기하고 체험학습을 전체 지원 사업으로 교체하는 것을 건의하며 통화를 끝냈다. 못 가는 학생에게 돌아올 때 예쁜 선물 사오마고..
3월 4일 개학을 하고 마지막 날이다. 달리기 10킬로 정도는 시원하다 느낄 정도로 체력이 좋은 나도 금요일 6교시 입술에 물집이 잡히려는지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이 든다. 3월 4일 개학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꽉 채우기 때문에 일 년 중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교사와 학생이 함께 경험한다. 아침에 조회하며 “금요일, 우리 오늘까지 잘 왔네요.”했더니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1학년이라 생활기록부 사진을 걷고 있고, 응급의료 어쩌고 하는 가정통신문을 비롯하여 6가지 통신문을 배부하고 걷어서 제출했다. 학부모총회 안내 통신문이 오늘 또 나간다. 지금까지 회수된 통신문에서 참석자가 저조하다고 다시 또 보낸다고 한다. 나무야 미안타! 오늘도 메시지가 30개가 넘게 왔고, 그 중엔 교복 잘 ..
3월 1일. 새 학기 시작이다. 달력의 연도가 바뀌고 설날이 지나도 학교 시계는 3월 1일이 시작이다. 그래서 학교 오래 다니다 보면 숫자가 바뀌는 새해는 남의 생각이고, 3월 1일 지나야 새해가 내 생각 안으로 들어온다. 지난 2월 새 학기 맞이 연수에선 작년 9월에 새롭게 발령받아서 온 교장 샘이 느닷없이 학교 비전을 새롭게 고쳐보았다면서 파워포인트를 띄워 몇 가지를 고친 것을 보여주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학교 비전을 교장 혼자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굳이 혼자 끙끙대면서 고쳤다니 말이다. 다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며 만든 비전도 교사가 다음 해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서 흐려지고, 언제 그랬냐 싶게 원래 느슨하고 별 생각 없는 문화로 돌아가는데, 교장 혼자 만든 비전을 ..
다음 주 중반부터 우리학교는 24학년도 학교 운영을 위한 다양한 협의를 하기 위해 학교에 출근을 한다. 방학 중 41조 연수의 내용에는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점검(앞으로는 생기부)이 없지만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생기부 점검을 방학 계획에 포함시켜서 1월 31일까지 하고, 2월 8일까지 발견된 오류 수정을 했다. 매사 치밀하지 못하고 덜렁덜렁하는 나는 교무부 생기부 담당자가 보낸 메시지를 앞 부분만 읽고 첨부물에 붙은 구글 스프래드 시트는 펼쳐 보지 않고, 내 나름의 상상으로 생기부 점검을 했다. 내가 했던 작업은 우리반 학생들 생기부와 내가 들어가는 반 과목별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앞으로는 ‘과세특’), 동아리 활동 상황 기록을 점검한 후 고치는 것이었다. 메신저 밑에 구글 주소는 아마도 담임이 ..